야심한 시각에 발소리가 들린다. 귀가 예민한 소녀는 혼자 눕기에는 넓은 침대 위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노력해서 들으려고 한 적은 없지만, 귀에 들어오는 소리들이 있다. 먼 곳에서 누군가 문을 열었거나, 물건을 떨어뜨렸거나하는 그런 조그만 소리들. 평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들이지만, 이건 조금 익숙한 소리였다.
낯익은 무게감이 뚜벅뚜벅하고 가까워진다. 물건의 윤곽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만 희미한 조명이 들어와있는 방 안에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소녀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쪽을 보았다. 그림자가 진 얼굴이 웃는 것은 어두워도 알 수 있었다.
"기다렸어?"
"어디 갔었어요…… 노네."
두 사람 다 이 저택 안에 하루종일 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같이 보냈다. 식사도 간단한 산책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때우는 일도, 그리고 특히나 잠들 때에 같이 있었다. 오늘은 밤이 깊어가는 가운데 소녀가 침실에 잠시 혼자 있었고, 노네라고 불린 남자가 곧 소녀의 곁으로 돌아왔다.
"어디, 음 어디…… 잠깐, 운동 삼아 구석구석 돌아다녔는데……."
곁으로 다가와 털썩 앉은 남자는 침대에 앉아도 조그만 소녀보다 한참 커다란 느낌이 났다. 그 상태로 소녀의 손을 잡자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움직여 노네의 얼굴을 보았다. 소리에는 민감하지만 다른 것은 잘 모르는 소녀가, 평소보다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 숨이 턱 막혔다.
입술을 빼앗기는 느낌은 처음은 아니었지만, 감각이 둔한 사람에게도 확실히 느껴질 정도로 냄새가 훅 끼쳤다. 길지 않게 입술을 맞댄 뒤 토끼같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녀는 물었다.
"술…… 마셨어요?"
"아니아니~ 안 마셨어! 마신 거 아냐!"
술 냄새가 나는데…… 미심쩍은 얼굴로 소녀가 쳐다보자 노네는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런 걸 일부러 마실 이유도 없고! 와하하!"
자기가 나서서 마신 건 아니라는 뜻 같지만, 역시 취한 게 아닐까. 소녀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는 그대로 소녀를 끌어안고 뒤로 누웠다. 넉넉하고 푹신한 침대 위에서 누운 채로 마주보며 노네가 씩 웃었다.
"우리 마거릿~"
"노네……?"
"마거릿……."
보통 사람이라면 아프다고 할 정도로 세게 끌어안았지만 아픔을 모르는 소녀는 여전히 눈만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약하게 술 냄새가 나는 채 남자는 마거릿의 얼굴에 몇 번 입을 맞추었다. 그러다가 짧은 머리카락 옆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는 그 아래에 있는 뼈에, 그 다음은 더 아래에, 간지럽기는 했지만 소녀는 벗어날 힘도 생각도 없었다.
그냥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노네는 취해있다. 잘 모르지만 주정을 부리는 사람은 내버려두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 그의 행동이 어쩐지 점점 평소와는 달라졌다.
뺨부터 목, 그리고 목 주위의 옷 안쪽을 부드럽게 물고 핥는 움직임에 마거릿이 살짝 몸을 뒤틀었다. 잠옷 대용으로 입고 있던 커다란 셔츠는 성인 남자의 것이어서, 목까지 단추를 잠가도 둘레가 한참 남았다. 노네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던 마거릿이 무의식중에 아, 하고 작게 소리를 내자 그가 입을 떼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마거리잇~"
"취했어요……?"
"마거릿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짓뭉갤 수 있을 것처럼 체격 차이가 나는 두 사람이다. 끌어안고 안 놓아주려는지 노네가 소녀의 몸에 얼굴을 묻고 차분하게 숨을 쉬었다. 손을 잡거나, 끌어안거나, 입을 맞춘다거나…… 처음 하는 일은 없다. 단지, 무언가 범위가 더 넓어진 기분이 드는데, 하고 마거릿은 생각하다가 답을 냈다.
묘묘님께서 신청해주신 가면라이더 더블의 쇼타로X아키 정부 스파이X반정부 혁명가 AU 글입니다.
정부의 요인이었다가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정부에서 돌아서 혁명가가 되었지만 살해당한 나루미 소우키치와, 그런 아저씨 곁에 있다가 그 이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던 쇼타로.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정부가 하는 대로 실행하는 것이 옳다는 필립의 말에 설득당하고 정부측에 선 쇼타로는 명령을 받고 아저씨의 딸로서 나루미 소우키치의 죽음 이후 반정부 혁명가로 활동하여 중요 인물로 떠오른 나루미 아키코의 곁에, 그녀를 죽이기 위해 가게 되는데......
"아키코, 할 얘기가 있는데."
"응? 뭔데?"
웬일로 모자를 벗은 채 쇼타로가 먼저 휘적휘적 걸어갔다. 아키코는 아지트의 뒤편으로 가는 길을 타고 폴짝폴짝 뒤를 따라갔다. 처음 만났던 때에 쇼타로가 여중생인 줄 알았다고 놀렸던 것처럼 아키코는 여전히 소녀 같았지만, 그 외모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강단과 의지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니 아저씨의 딸이고, 혁명을 꿈꿀 수 있었겠지.'
착잡한 표정을 감출 도구가 없다. 쇼타로의 뒤에서 아키코는 그가 꺼내려는 화제를 짐작해보았다. 역시 얼마 전에 테루이쪽과 벌였던 언쟁 탓일까? 반정부 활동쯤 되는 위험한 일이면 많은 이들의 의견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혁명가뿐 아니라 예상 밖의 민간인 사상자가 대규모로 나온 사건에서 아키코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거기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했다. 다만 누구도 이렇게 될 거라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므로 우리들의 탓인지, 우리들을 이렇게 몰아간 정부의 탓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다. 아키코는 이러한 사태의 재발 방지와 더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가능한 만큼 피해 보상을 해줘야한다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우리가 혁명을 하는 의미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혁명파 내부에서 아키코의 영향력은 상당했지만 반발은 있을 만한 의견이었다. 행동하는 데에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는 아키코다웠지만, 그 자리에서 쇼타로는 그렇게만은 할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하는 테루이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다는 아키코 사이에서 중재를 했었다. 그 때의 쇼타로는 묘하게 평소보다 말 수가 적고 가라앉아있어서, 의견이 있어도 말하지 않고 아껴둔 것 같다고 아키코는 느꼈었다.
"여기면 돼?"
"그래."
적당히 걸터앉은 아키코의 곁에서 쇼타로가 무거운 표정을 고수했다. 아키코가 그런 쇼타로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무게잡지 말라고 핀잔을 주었다.
"무슨 얘기길래 계속 그런 얼굴이야?"
"그냥 뒤숭숭한 일도 좀 있었고, 상담하고 싶은 것도 있고."
"오, 쇼타로가 나한테 상담? 드디어 이 누님에게 기댈 마음이 생긴 거야?"
아키코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쇼타로도 하하, 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누님은 무슨, 그 꼴로 어디 가서 내가 이 동네 리더요~ 해도 장난인 줄 알겠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상담하고 싶다는 건 바로 여기 계신 하프보일드씨라구. 이 아키코가 좀 믿음직하지?"
지나치게 믿음직해서 문제지. 머리에 모자를 얹은 쇼타로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다쳤던 데는 괜찮아?"
"다 나은 지가 언젠데!"
"저번에 암호문이 발각된 거, 새 암호문 짜는 거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건 류군이 혼자 다 해버렸더라구."
"창고 관리도 문제 없었나?"
"아무 일도 없답니다! 자, 뒤숭숭한 일의 확인이 끝났으면 이제 상담하고 싶은 내용이 뭔지 말해줄래 쇼타로군?"
아키코가 빨리 본론을 내놓으라고 입술을 쭉 내밀며 투정부리듯 말을 던졌다. 오늘 쇼타로는 좀 이상했다. 방금 전에 물어본 것들도 사실 굳이 할 말이 있다고 따로 불러내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상담이라는 게 뭔지 들어야만 할 예감이 들어서 아키코는 쇼타로가 말하지 않으려고 하면 추궁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쇼타로가 곧 입을 열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싶어서."
"뭐라고?"
"나도, 너도, 이 혁명도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안해졌다고."
아키코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일어났다. 만난 이래 쇼타로가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아키코가 혁명 활동을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혁명가 나루미 소우키치의 딸, 나루미 아키코라는 이름이 알려지고 아버지의 이름에 못지 않은 활동이 나타나면서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쇼타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악덕 정부에게 돌아가시기 전의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다는 쇼타로는 아키코가 잘 모르는 부분의 나루미 소우키치를 알았고, 덕분에 쇼타로와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아버지처럼 모자를 쓴 그는 혁명에 동참하면서 과거도 속내도 잘 말해주지는 않는 주제에 평소엔 허술하고 어수룩한 구석이 있었다. 하드보일드한 나루미 소우키치를 따라가려고 하지만 반밖에 따라가지 못해서 하프보일드, 아키코는 호감을 담아 쇼타로를 그렇게 불렀다.
적어도 그 하프보일드 안에, 나루미 소우키치의 뒤를 따라 혁명을 성공시키고 사람들을 해방시킨다는 의지만은 굳건할 거라고 아키코는 믿었다. 하지만 쇼타로도 사람이니 때론 불안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 이런 상담이라면 있을 법했다.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 리도 없었고 말이었다.
"최근에 여러 가지 많긴 했지. 죽은 사람도 끌려간 사람도 있고."
"……어."
"그래서 더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때론 불안해. 정말 성공할 수 있을까, 아버지도 힘들어하셨던 일을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있어.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엔 이런 말 못하겠지만. 쇼타로도 그래서 나한테 말하고 싶었던 거지?"
작은 불안은 때로 큰 파문이 된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루미 아키코가 하는 말 한 마디가 누군가를 무슨 길로 이끌지 모르는 일이다.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있는 아키코에게는 쇼타로가 예전에 아저씨에게서 보았던 카리스마가 비치는 듯했다.
그런 것을 처음 느꼈을 때엔 아저씨가 생각나서 웃었던 쇼타로는, 지금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아키코는 그걸 쇼타로의 불안이라고 느끼고 말을 계속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아, 저기 물론 무조건적으로 괜찮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잖아. 얼마 후엔 그 계획이 완성될 거고, 시작만 되면 이번에야말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어. 지금은 때가 아니냐는 말도 있었지만 나는 역시 지금이라고 생각해. 더 미룰 수는 없으니까."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고, 언젠가 꿈이 이루어지는 미래. 아키코는 쇼타로와 함께 그곳에 서있는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기뻐서 울 것 같은 표정을 모자로 애써 가리고 있으면, 손을 잡고 잔뜩 놀려주고 싶었다. 그런 상상을 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불안들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상정해보았던 불안이 현실이 되는 순간, 아키코는 꿈에서 벗어나 혁명의 앞에 서있었다.
"그래. 더는…… 미룰 수 없지."
"쇼타로군……?"
차가운 총구는, 그녀가 올려다보면 쇼타로의 눈을 가릴 만한 곳에서 아키코를 노리고 있었다.
아키코의 몸에 숱하게 겪어온 긴장이 깃들었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일지 모르는 상황은 무수히 당했다. 동료일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총구를 겨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믿고 싶었던 사람일 뿐이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한번쯤 해봤어."
계획했던 일들에서 예기치 못한 구멍이 눈에 띄면, 혁명의 지도자가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내통하고 있거나, 간첩이 숨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회유당한걸지도 모른다. 눈앞의 남자가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아키코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바로 쏘지 않았다. 아직 이 상황을 멈출 여지는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왜 쏘지 않는 거야? 납치라도 할 셈?"
"넌 아저씨의 딸이니까, 진실 정도는 알려줘도 괜찮겠지."
쇼타로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아저씨와의 인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점점 썩어가는 정부, 쇼타로에게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라며 혁명가로 돌아서고 살해당한 아저씨, (아키코는 누군지 잘 모르지만) 필립의 제안, 아키코에 대한 의도적인 접근, 그리고.
그래, 나도 알아. 네 곁에서 지켜봤지. 아저씨가 이루려고 했던 뜻, 사람들의 행복, 아저씨와 같이 있던 시간은 길지 않으면서도 점점 아저씨를 닮아가는 너, 그 옆에서 내가 정말로 너와 한 편이 된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던 나.
하지만 격동의 가운데에는 그 어떤 때보다 많은 피가 흐른다. 멈춰설지 물러날지 결정하는 자들은 피웅덩이 위에서 전진하고 후퇴한다. 자신의 의지로, 혹은 타인의 의지로.
쇼타로는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주동자가 죽은 뒤 밀어붙이는 게 가장 기본적인 제압 방식이지. 나는 너를…… 죽여야 해."
모자의 챙이 이 그늘로 다 가려줄까, 꼴사납기 그지없는 이 얼굴을. 이렇게 반짝반짝 빛나면서 아름다운 세상의 꿈을 실현하려던 이를 잊어버리지 못할 표정을.
네가 하프보일드라고 부르는 나보다 훨씬 아저씨를 닮았을 네가 평소와 하나도 다름없는 얼굴로 선언하면 흔들려버리고 말 것 같았다. 쇼타로는 헛웃음을 삼키느라 애를 썼다.
'아버지랑 아는 사이라고? 정말?'
'제자 비슷한 거였달까…….'
'허풍 아니지?'
쇼타로를 증명해주었던 것은 아저씨가 그에게 남겨주고 간 모자였다. 필립이 보낸 잠입이었지만, 거기서 시작된 인연이었다.
그 뒤로 계속 네 곁에 있었어. 아저씨의 딸이자 내가 언젠가 죽여야할지도 모르는 사람, 그러니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었다.
네가 언제 어디에 있더라도, 아저씨의 딸이 아니었더라도 너를 만났더라면 나는 네 영혼이 찬란하다고 느꼈을 거다. 이 정체되고 검게 물들어가는 나라에서 결코 꺾이지 않을 너를 내 손으로 꺼뜨려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대답은 쇼타로가 기대한 대로였다. 빈틈을 노려 손목을 치고 쇼타로의 자세를 흔들리게 한 아키코가 뒤로 한 바퀴 물러나 호신용 총을 꺼냈다. 쇼타로는 이번에야말로 허탈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한다고 주장하는 아키코에게 쇼타로가 그럼 이거라도 배우라며 가르쳐주었던 호신술이었다.
쇼타로가 총구를 정조준하는 것과 동시에 아키코가 손에 듣 쇠붙이에서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그렇겠지."
아키코의 눈에 쇼타로의 냉엄한 얼굴이 들어왔다. 한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때로 멍하니 먼 곳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태도로 쇼타로가 앉아있으면 다가가서 일하라며 등짝을 때린 적이 종종 있었다.
그건 아마 그가 이런 얼굴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왜…… 이렇게 된 거야?"
아키코는 그를 쉽게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나루미 소우키치의 죽음은 아키코에게도 쇼타로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거기부터 갈라져서 온 길이었다. 아키코와 쇼타로가 교차한 지점은 이제 여기서 다시 또 갈라질지도, 나란히 놓일지도 모른다.
쇼타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흔들림없이 뻗은 손끝에는 여전히, 탄환을 품은 권충이 건재했다.
"쇼타로군, 총을 버리고 이쪽으로 와줘. 그러면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할게. 우린 곧 성공할 수 있어. 체재를 바꾸는 거야, 더 이상 아무런 피도 흐르지 않게."
아저씨의 꿈, 아니, 이제는 네 꿈을 말하는 네가 이렇게 눈부신데.
'쇼타로, 혁명을 한다는 인간들은 언제나 정론을 말해. 하지만 너도 알잖아? 정론은 정론일 뿐이야.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은 일단 무시하는 거지. 그러니 그들에게 현혹되지 마.'
네 말도 옳아, 필립. 나는 그렇게 느끼고 여기에 왔어. 하하, 나도 참 줏대가 없어. 하프보일드라고 놀림받아도 이젠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을 거야. 나는 그저…….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어. 조금이라도 이런 혼란 상황을 빨리 끝내려면 이 길밖에 없어."
"쇼타로군! 아무리 밟아도 이 불씨는 꺼지지 않을 거야!"
아키코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쇼타로도 알고 있다. 아키코가 죽으면 누군가가 새로이 지도자가 되고, 또 다른 간첩이 죽이러 올지도 모르고, 그렇게 반복되고, 시체 너머에서 누군가의 울음 소리가 들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도 울리고 싶지 않아."
나는 너를 만난 이래 계속, 진실과 거짓을 반반씩 말해왔어. 아저씨에 대한 것들은 전부 진실이었고, 나에 대한 것들은 전부 감추었지.
이건 진심이야, 나는 누가 우는 걸 보는 게 지긋지긋해. 이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남몰래 울던 너를 본 그 순간부터, 더더욱.
쇼타로가 움직였다. 아키코도 누군가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낌새 정도는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명중률은 형편없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하는 것보다 결심을 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총성은 거대했다. 조금 전까지야 아무도 오지 않을 곳이었지만 이젠 누군가 달려올 수밖에 없었다. 아키코는 몸에 긴장이 풀리며 털썩 쓰러졌다. 스친 상처조차 없었다.
"쇼…… 타로군?"
소리없는 웃음을 지으며 모자를 끌어안고 그 자리에 쓰러진 쇼타로에게 아키코는 총을 내팽개치고 달려갔다. 옷에 점점이 번지기 시작한 핏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쇼타로 곁에 떨어진 총은 싸늘하기만 했다, 발사되지 않았으므로.
피가, 검은 옷을 축축이 물들여버리고.
"나…… 이런 거 들은 적 없어!!"
몸 어딘가의 급소를 맞은 듯한 쇼타로의 몸이 물을 먹은 듯이 무겁게 축 늘어졌다. 당황한 채 아키코가 쇼타로를 잡고 흔들자 쇼타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높게 울리는 목소리에 귀가 아프다. 하지만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아키…… 코."
"자, 잠깐만 정신 차리고 있어봐.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다 나으면 백 배 천 배 나한테 빚 갚아……!!"
"넌 정말…… 시끄럽고, 여자로서 매력도 없…… 고, 처음 만났을 때도 덜렁대서 내버려둘 수도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말 그만 해! 피, 피가."
"……매일 떠드는 걸 보고 있으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나 싶었지, 모두가 절망적이어도 너 혼자, 멍청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현실이 아무리 어두워보여도, 돌진해버려서 따라가느라 애도 먹었, 고…… 같이 도망치던 중엔, 네 뱃속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들킬 뻔도 하고…….“
지금 하기엔 이상한 소리를 줄줄이 늘어놓는 쇼타로를 보며 아키코는 빽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네 주변에 사람이…… 늘어날 때마다, 다들 천방지축인 네가 아저씨 딸이라는 걸 반신반의할 때마다 솔직히……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거든, 이런 왈…… 가닥이, 도대체가 왜, 아저씨 딸이고…… 주동자인지."
아키코의 손 안에 담긴 온기가 곧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쇼타로는 말이 많았고 아키코는 듣고 싶지 않았다.
"나 여기 있을게. 가지 말라는 거지? 총소리가 났으니까 누가 올 거야, 그 때까지만 눈 뜨고 있어봐!“
"……그렇지 않았으면 나는 너를…… 만나지 못했겠지."
그리고 너는 결국 모두가 기대하고 너에게 덧씌운 이미지대로의 사람은 아니었어도, 내가 아는 아저씨의 딸이고 내가 이렇게 이끌려버린 사람이었다.
"……네가 혁명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나…… 와 만날 수…… 없었……을……."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딘가에서 소시민으로 밝게 웃으면서, 천방지축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너와 내가 시간을 공유한 적이 없었더라도 너는 너였을 거야. 너를 만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조금 다른 사람 같지만.
쇼타로가 삼켜버린 말은 들을 수 없는 아키코가, 감정에 북받혀 목이 메인 채 외쳤다.
"뭐야, 뭐냐고! 그런 소릴 할 기운이 있으면 벌떡 일어나서 괜찮다고 하란 말이야!!“
"볼수록 네가 정말, 따뜻하고…… 재잘재잘 떠드는 게 가끔 귀엽기도, 하고…… 네 곁을, 다른 사람에게 주…… 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누르며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떠들 기운이 남아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아직도 어린애 같고, 혼자 두고 싶지 않지만…… 넌, 혼자 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좋은 사람이야."
그러니 나 같은 하프보일드보다 훨씬, 멀리 갈 수 있을 거야.
"지금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입 다물고 있어! 지, 지혈부터 하면 되나? 어어쩌지!?"
당황하여 손을 덜덜 떠는 아키코를 점점 몸이 가라앉아가는 쇼타로가 시리게 붙잡았다.
"괜찮아."
"뭐가 괜찮아!! 사람들을 울리고 싶지 않다면서, 나를 죽여야 한다며! 왜 쏘지 않았어!? 차라리 네가 나를 쐈으면, 나, 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키코에게서 터져나온 눈물이 후두둑 쇼타로에게 흘러떨어졌다. 차라리 쇼타로도 방아쇠를 당겼더라면, 원망이라도 할 수 있잖아. 서로 똑같은 짓을 했으니까.
쇼타로는 희미하게 다시 웃어보였다. 이제 얼굴을 가려줄 모자 같은 건 남아있는 줄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우는 것도 싫…… 지만, 네가 우는 걸 보는 게…… 가장 싫었는데……."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도 손을 더 들어올리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그녀의 빰에 손이 닿자 어떻게든, 쇼타로는 손가락을 움직였다. 따뜻한 액체가 식어가는 피부를 적시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이.
"아키코, 나는…… 네가……."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붙잡은 손의 생명이 사라져버리는 느낌이었다. 몇 번이나 보았던 아키코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죽음은 이렇게 찾아와버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심장을 후벼 파고.
"쇼타로…… 쇼타로!!"
눈을 감은 그를 잡고 흔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사람을 불러왔더라도 조약한 아지트에서 응급처치는 힘들었을 것이다. 설마 처음부터 총에 맞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을까. 이 남자라면 그럴 만했다. 피를 최대한 흘리지 않고 상황을 끝내는 법은 둘이었다. 정부가 이기든가, 우리들이 이기든가. 정부가 이긴다면 우리들의 피만 흐르고 끝이 난다. 우리들이 이긴다면, 함께 해준 시민들이 얼마나 다치고 눈물 흘릴지는 몰라도 끝은 난다. 아키코가 죽으면 정부가 유리해지는 것처럼, 정부의 요인 중 일원인 쇼타로가 사라진다면 승기는 조금이라도 이쪽으로 돌아선다.
설마, 그런 걸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이미…… 울려버렸잖아. 다른 사람은 무슨 다른 사람이야…… 이 멍청이 하프보일드!!"
총성의 진원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매던 테루이 류가 그 자리에 도착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내팽개쳐진 두 자루의 권총과, 바닥에 떨어진 모자 하나,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남자를 끌어안은 채 오열을 멈추지 못하는 아키코. 그게 테루이가 볼 수 있던 광경이었다.
웨르테스 가운데에 위치한 집은 그간 바빴던 세넬이 기억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여길 몇 년씩 못 본 것도 아닌데,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며 세넬은 가볍게 문을 두드린 뒤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열고 들어갔다. 집주인과 그 정도는 해도 괜찮은 사이였으니.
"윌, 있어?"
"세넬인가?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보군."
"내가 조금 일찍 온 것 같기는 한데…… 뭐하는 거야?"
"해리엇이 가마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해서 살피는 중이었다.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라…… 세넬도 왔으니 나중에 하지."
웅크리고 있던 큰 등이 이쪽으로 돌아섰다. 가마를 만지던 손에서 장갑을 뺀 윌이 그제야 세넬을 마주보며 제대로 인사해주었다.
"어서 와라, 몇 주 못 봤다고 굉장히 오래간만인 기분이군."
"나도 그래."
"네 활약상은 익히 들었다."
"별 거 아닌걸."
유적선 등지에서 마린 트루퍼 일을 다시 시작한 세넬 쿨릿지는 유적선 등지에서 그 실력에 대해 소문이 자자했다.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물의 민족만큼이나 뛰어난 수영 솜씨라는 말까지 윌에게 들려온 적이 있었다. 윌은 진심으로, 그간 숱한 사건을 겪으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성장한 세넬을 칭찬했다.
"유적선에 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든든한 트루퍼가 있는 건 정말 안심되는 일이지."
"그러는 윌이야말로 대단한 학자잖아. 연구하던 건 잘 되어가?"
"으음, 해리엇까지 도와주고 있지만 영 완성되질 않아서 말이다."
"해리엇은 없어?"
"오늘은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너희들이 전부 모일 때쯤엔 돌아오겠다고는 했어."
유적선에서 박물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윌은 새로 채집한 표본의 분석인지 무엇인지에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세넬로서는 전부터 몇 번씩 들어도 잘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그냥 윌이 곤란하구나, 하는 정도로 넘겼다.
"슬슬 시간 약속에 늦지 않는 사람들이 올 때가 됐겠군."
"실례할게, 레이너드."
집주인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으며 들어온 사람은 세넬과 윌이 아는 대로 허리 한 편에 검을 찬 채였다. 세넬이 가진 기억 속의 소녀 기사는 조금 더 성숙해진 채 웃고 있었다.
"오래간만이야, 클로에."
"아, 응. 먼저 와 있었구나."
세넬을 보며 수줍게 인사한 클로에가 자리에 앉았다. 서 있던 세넬도 윌이 권한 곳에 앉은 뒤 클로에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유적선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한 차례 끝난 뒤, 클로에는 기사로서의 신념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던 터였다. 진짜 기사 작위보다 중요한 마음가짐을 실천하겠다는 그 행동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꽤 되는지, 트루퍼로 일하며 세넬은 종종 클로에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셋만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네."
"윌이랑 클로에랑 셋이서 산적 아지트에 갈 때였나?"
"클로에가 우리를 산적으로 오해했었지."
"부, 부끄러우니까 그 얘긴 하지 말아줘."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그렇게 행동하기 전에 상대를 조금 더 주의깊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며 클로에는 말했다.
"그 뒤에 모두와 유적선에서 많이 배웠으니까 말이야."
"그 뒤라……."
"짜자잔! 세이프! 무사도착!"
많은 일이 일어난 뒤에 조금도 '조용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배우지 못한 듯한 사람이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집주인이 한숨을 쉬었다.
"노마…… 문은 손으로 여는 거다. 특히 다른 사람의 집 문은."
"윌리에 대한 반가움을 좀 세게 표현해봤어! 난 오래간만에 돌아왔잖아. 야호! 세네세네랑 꾸띠는 제대로 도착해있었네? 나까지 약속을 지키는 올바른 사람들이야!"
클로에가 시각을 확인해보니 딱 그랬다. 이제부터 노마보다 늦게 오는 사람들은 지각이라고 놀림당할 게 빤히 보여서 세넬은 가장 많이 당할 사람의 얼굴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모돌이는 그렇다치고 제리도 늦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세네세네가 있는데 리링이 없으면 이상하다구."
"셜리는 물의 민족 마을에서 일이 있다고 했어."
물의 민족과 땅의 민족이 화합할 수 있다고 믿는 셜리는 물의 민족과 다른 사람들을 잇는 다리가 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다. 물의 민족은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있는 만큼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유적선 내의 권리를 온건한 방식으로 찾기 위해서는 셜리의 방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조금은 인정한 터였다. 세넬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노력하는 셜리를 계속 지켜보고, 응원해주고 있었다.
수선을 떠는 노마가 반가운지 클로에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노마는 까딱하면 못 올 줄 알았는데 만나서 다행이야."
"후후후,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꾸띠! 세계 최고의 트레저 헌터는 못 가는 곳이 없다구! 대륙에서도 유적선까지 슝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정말로 세계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적선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의 트레저 헌터로 성장하고 있는 노마는 관련자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 단, 좋은 이야기보단 시끄럽고 곤란한 쪽의 명성이 아직은 더 높다는 게 문제였다. 늘 그랬듯이 너스레를 떨며 달라붙는 노마를 클로에가 부드럽게 웃으며 상대하는 사이 누군가가 노마보다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떠들썩한 걸 보니 잘들 있었구마이."
"모제스!"
"여 쇠똥이, 간만에 나가 몸이 근질근질헌디 이따가 한판 워뗘?"
어깨에서 뚜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제스가 세넬의 옆에 앉았다. 호기롭게 웃은 세넬이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유적선에 있었는데도 모제스와 본지도 꽤 됐었구나."
"쪼매 돌아당겨도 허벌나게 바쁜 게 인생인겨."
기트를 떠나보낸 이후 유적선, 아니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마수들과 효과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을 찾겠다는 목표를 최근 세운 모제스는 학자인 윌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딜 또 다쳤는지 세넬이 모르는 상처자국이 몇 개 늘은 듯했다. 세넬이 있는 곳에도 가끔씩 나타나서 쓸 만한 거 없냐고 두리번거렸기에 세넬과 모제스는 최근에 본 적은 있는 편이었다.
"바쁜 모제스님이라니, 예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할 일이 없어보이는 분이셨는데 말이죠."
"우와아앗! 짹짹이 너 시방 온 것이여?!"
짹쨱이는 왜 없냐고 묻기도 전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엎어질 뻔한 모제스의 옆에서 정말 바람처럼 나타난 바람의 제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떠들석해진 틈을 조용히 파고든 것이 제이의 특기다웠다. 생글생글 웃으며 제이가 고개를 숙여 바르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꼭 받아야하는 중요한 편지가 있어서요."
"정보 관련인가?"
"뭐 그렇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유적선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상답게 제이는 이제 유적선뿐만 아니라 세계의 동향을 주목하고 관찰하는 전략가로서 알음알음 알려졌다. 그 어느 국가나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지략을 짜내는 제이를 적으로 돌린다면 실로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키가 조금 자란 듯한 제이였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여러분을 만나러 간다니까 모프모프족 모두가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거 고맙군. 그러고보니 다음에는 모프모프족을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괜찮나?"
"윌님의 이번 연구가 끝나면, 이었죠? 저나 모프모프족이 가능한 만큼 협력할 테니 다음에 얘기하죠."
"우와, 거의 다 모였네! 리링만 오면 되나?"
노마가 신나하며 벌떡 일어나 방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제이가 이때라는 듯이 노마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노마가 늘 하던 대로 괴상한 노래를 불렀다.
미리 준비해둔 차를 가져온 윌을 도와주고 있던 세넬이 갑자기 멈춘 노마에게 시선을 돌리자, 노마의 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그그그그게."
"노마, 무슨 일이야."
찻잔에 손을 가져가기 전에 클로에가 노마 옆으로 가보기도 전에 노마가 펄쩍 뛰어올랐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구리리 언니!! 못 오는 거 아닌가 했는데!"
유령처럼 거실 한쪽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여자의 인영이 몸을 돌렸다. 화사하게 웃는 모습이 아름답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집주인도 가장 처음 온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림자가 태평하게 인사했다.
"언제부터일까……? 처음부터?"
"윌, 몰랐어?"
"……전혀 몰랐다. 가마를 보고 있다가 느낀 인기척은 세넬 네가 첫 번째였으니."
놀라기를 멈춘 노마가 바닥에서 일어난 그류네를 덥썩 끌어안으며 집 전체가 울릴 듯이 방방 뛰었다.
"보고 싶었단 말이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달라구!"
"으응, 와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오고 나니까 너무 졸려서 그만."
'그래서 바닥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모두의 황당함은 뒤로 하고 노마가 그류네를 끌어다가 앉혔다. 정이 많은 노마가 유독 그류네를 이렇게 반기는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 말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셜리를 포함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원이 겪었던 슈발츠와의 격렬한 전투 이후, 모두는 스스로가 어떻게 될지 알고 결단을 내렸던 그류네를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그류네를 다시 만난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한 선물이었다.
여전히 보안관 취급을 받는 윌이 유적선 어딘가에서 구조된 정체불명의 여성을 데리러 갈 때만 해도, 당연히 그게 그류네라고 예상했을 리가 없었다. 익숙한 실루엣을 보고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윌은 잠들어있는 그류네를 데리고 절차를 밟아 병원에 눕힌 뒤, 제이를 불러 동료들 모두에게 급하게 연락을 넣었다. 당시 유적선에 있던 제이, 세넬, 셜리, 모제스는 달려와서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대륙에 있어서 소식이 닿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던 클로에는 여행 일정을 바꾸어 바로 달려와주었다. 노마가 가장 멀리 있었기 때문에 노마는 그 당시에 바로 그류네를 보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그류네가 깨어난 뒤 만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그류네를 볼 때마다 유독 반가워하는 노마였다.
한참이고 잠자는 공주처럼 원인 불명으로 누워있던 그류네가 눈을 뜬 것은 조금 시간이 흘러서였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눈을 감을 때 작별을 고했던 사람들이 보이는 걸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류네를 껴안은 셜리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원래 사람이 아닌 존재였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살아있게 된 그류네는 유적선을 말 그대로 정령처럼 떠돌면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윌이나 제이도 전혀 그류네의 거취를 알 수 없었지만, 웨르테스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그류네에게 완전히 익숙해졌는지 마치 자연현상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류네의 특징 덕분일지도 몰랐다.
"알았지 구리리 언니? 오늘 모임 끝나기 전까지는 자면 안 돼!"
"으응, 노력은 해보고 싶지만……."
노마가 졸랐지만 그류네의 대답은 석연치 않았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부작용이라도 되는지, 그류네는 대부분의 시간을 처음 발견되었던 때와 슈발츠와의 결전 이후 사라졌다가 발견되었을 때처럼 자고 있었다. 그럴 때엔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옅어져서, 조금 전의 노마처럼 보고 깜짝 놀라다가도 그게 그류네라는 걸 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유적선 사람들은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취급이었지만, 그류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다들 약속된 사람 수에 그류네를 예외로 취급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전부 모였다는 생각에 다시 노래를 부르려는 노마, 최근 새로 배운 전투 기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클로에과 세넬, 해리엇의 귀가를 신경쓰는 윌, 모제스가 최근 마수들을 상대하다가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고 놀리는 제이, 모제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면서 제이가 일부러 그런다는 걸 눈치 채고 받아치는 모제스, 꾸벅꾸벅 졸 것처럼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는 그류네, 그 사이로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해리엇이라면 굳이 문을 두드리진 않을 거고……."
"이뿐이겄구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셜리뿐이니, 윌과 모제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세넬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제이가 곱게 닫아놓은 문을 당기고, 세넬은 거기 서 있는 사람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너."
"아, 안녕, 오빠. 들어가도 될까……?"
세넬이 문을 열 줄 몰랐기 때문에 한껏 어색하게 웃고 있는 셜리의 곁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당연하지."
"실례하겠습니다……."
동료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다만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셜리까지만 오면 모두 모인다고 했던 것은, 그 남자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다들 생각한 탓이었다.
오늘도 그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표정에 익숙해진지 꽤 된 세넬은 셜리가 들어온 뒤에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너도 얼른 들어와, 월터."
물의 민족의 전도유망한 청년이자 메르네스의 친위대장, 그리고 차기 지도자로 거론되는 남자 월터는 세넬을 향한 날카로운 눈빛을 꺼뜨리지 않은 채 세넬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월터를 한번에 받아들인 사람은 셜리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메르네스로서 셜리가 그 때 말했듯이, 어째서 물의 민족과 땅의 민족은 이럴 수밖에 없었는가…… 그 해묵은 증오와 갈등을 떨쳐내는 것은 월터에게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으며, 세넬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월터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온 몸을 던져 메르네스를 지키려고 했던 월터를 빈사상태에서 살려낸 것은 셜리의 지극정성과 브레스계 조술을 사용하는 다른 동료들의 기적이라고 할 만한 노력 덕분이었다. 한참 후에야 의식을 되찾은 월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광적익으로 땅의 민족을 멸망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믿지 못한 채 절규했다. 물의 민족이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메르네스, 창아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셜리는 그런 월터의 손을 잡고 창아의 의지를 새로이 전하며 자신의 의견도 말했다. 증오로는 낳을 수 없는 미래를 찾고 싶다고. 만나버리고 만 이상, 물의 민족과 땅의 민족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새로운 미래를.
시간이 지나고 진정한 월터는 그것이 창아의 의지라면, 따를 수 있다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셜리에게 전달했다. 다른 물의 민족들보다는 늦은 결론이었지만, 메르네스의 친위대장이었던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준 것은 물의 민족이 가진 태도를 바꾸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셜리는 무척이나 기뻐했고, 그 소식을 들었던 세넬은 '잘 됐네' 하고 짧은 감상을 표했다.
문제라면 그 다음이었다. 깊게 새겨진 증오를 의식적으로 희석하려고 해도, 메르네스가 땅의 민족에게 노려졌던 때를 기억하는 월터는 셜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려고 할 때마다 강경한 눈초리를 보냈다. 물의 민족 마을과 웨르테스를 오가는 셜리가 곤란해한 것은 험악한 표정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는 월터가 여전처럼 호위를 핑계 삼아 때로 동행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말투가 그리 곱지 않은 세넬이 월터에게 대놓고 셜리가 불편해하니까 적당히 하라고 말했을 때에는 다들 한 마디씩 거들게 되었다. 클로에는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노마는 자꾸 그러면 페로몬 봄버즈를 소환하겠다고 놀렸고, 그 옆에서 윌이 노마에게 꿀밤을 먹인 뒤 피차 좋지 않았던 일들을 잊을 수는 없어도 조금씩 함께 걸어가보자고 말했다. 모제스는 마수와 인간도 통할 수 있는데 인간과 인간이 통하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냐며 그답지 않게 철학적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제이는 물의 민족이 메르네스와 창아의 의지를 따라 방향을 바꾸기로 한 이상 당신 혼자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던졌다. 그리고 천연 기운이 넘치는 그류네에게는 월터마저도 거역하지 못해서, 셜리를 따라왔다가 겉도는 월터를 끌어다가 처음으로 동료들 사이에 앉혔던 것은 그류네였다.
물의 민족도 땅의 민족도,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저는 오빠와 동료분들에게서 제가 배우고 느낀 것들을 월터도 알아줬으면 해요.
그게 메르네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월터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눌러가며 땅의 민족들 사이에 함께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땅의 민족에게 진 목숨 빚을 수치스럽게 여기기보다, 자신의 뜻에 함께 해주길 바라는 셜리에게 월터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물의 민족 마을에서 딱히 급한 일이 없을 때마다 친위대장으로서 셜리와 동행하기 시작했던 월터는 그렇게 전부는 아니어도 세넬과 동료들이 겪은 사건의 일부가 되었다. 함께한 것도 셜리에게 듣기만 한 것도 있었지만, 월터는 땅의 민족을 보고 느꼈다. 윌의 가족애, 노마의 굴하지 않는 노력, 복수심을 극복해낸 클로에, 소중한 것을 떠내보내는 모제스, 지키고 싶은 것 앞에서 물러날 수 없는 제이, 스스로 내린 결단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전진한 그류네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존중했던 셜리와 동료들을.
그리하여 월터가 땅의 민족에 대해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표하는 모습은 거의 없어졌지만, 메르네스를 뺀 누구에게나 가차없이 말하는 성격은 여전했다. 그래서 꼭 함께 있어야하는 모험길쯤 되지 않으면 셜리를 남겨둔 채 자리를 피하기도 해서, 노마나 모제스나 그류네가 넉살 좋게 끌고 와야 마지못해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앉아있곤 했던 월터가 이렇게 단체 모임 자리에 찾아와 문을 두드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세넬도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것이었다.
그류네가 돌아온 이후 이렇게 다같이 모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의 중요한 자리였다. 월터가 당당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 노마가 셜리의 귀에 속삭였다.
"리링, 워리워리가 웬일이래?"
"저는 혼자 가고 싶다고 했는데……."
물의 민족 마을에서 볼 일이 끝난 이후 셜리가 출발하려고 하자 월터가 동행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런 성격의 모임이니까, 라고 말하면 월터가 마을에 있겠다고 할 줄 알았던 셜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실 전원 소집이라면 월터가 못 올 이유도 없긴 하고, 오는 길에 좀 신경쓰여서 물어보긴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흥미롭다는 듯이 클로에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셜리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은 바뀌었으니까요, 라고요."
창아만큼이나 큰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그류네와 슈발츠의 사건을 마지막으로 세넬 일행과 별로 본 적이 없던 월터는 그동안 많이 생각한 듯했다. 셜리가 봐주었으면, 판단해주었으면 했던 것들에 대해 결론을 내린 월터가 눈앞에 있었다.
"월터도 이젠, 여러분을 땅의 민족이 아니라…… 함께 싸우고, 같은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로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기뻐요. 월터가 저 대신 문을 두드렸을 땐 괜찮을까 싶어서 놀라긴 했지만요. 오빠가 놀란 걸 보니까 역시 조금 그랬던 것 같네요."
"……다 들립니다, 메르네스님."
월터가 핀잔을 주듯 한 마디 하자 역시 다 들은 모제스가 한 팔로 월터의 목을 끌어당겼다.
"월래리 니도 역시 꽤 좋은 놈이었구마이! 이뿐이의 정성이 통할 줄 알았구만."
"놔라."
칼같이 월터가 모제스를 떼어내고 옆으로 물러났다. 제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월터님은 월터님이네요. 뭐 저희를 예전처럼 보시지 않는다는 건 느끼곤 있었지만, 기왕 이렇게 오신 거 좀 더 솔직해지시라고요?"
"제이 너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어머, 그러게. 상냥한 제이니까."
"윌님과 그류네님은 꼭 이럴 때 아픈 데를 찌르신다니까요……."
늘어난 사람 수만큼의 의자를 가지고 온 세넬이 제이의 곁에서 웃었다. 월터의 자리는 맨 끝이자 셜리의 옆이었다. 월터와 미운 정인지 싸운 정인지 들어버린 세넬은 이젠 제법 아무렇지 않게 그 곁에 앉을 수 있었다. 월터가 불편해할지는 몰라도 말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답게 때로는 전원이 참여하는 화제가 나왔다가, 때로는 바로 옆 사람과 실없는 얘기를 하기도 하면서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월터가 앉아있는 곳만 조금 싸늘하기는 했지만, 집주인이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내온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세넬이 해리엇이 윌을 도와서 만들었다는 빵이 맛있다고 느끼며 우물거리는 동안 셜리는 아직도 월터를 신경쓰고 있는지 조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벌떡 일어난 노마가 외쳤다.
"윌리! 뭔가 허전하지 않아?"
"뭐가 말이냐."
"이런 날에는 역시 건배를 해야지! 이왕이면…… 맛있는 술로?"
"이 집에 그런 게 제대로 있을 것 같나?"
있어도 요리에 쓰는 술이겠지, 윌의 대답에도 노마는 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가져왔어!"
짐가방에서 주섬주섬 병을 꺼낸 노마가 뿌듯하게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술에 대해선 잘 모르는 세넬이나 클로에, 셜리로서는 그냥 술인가보다 싶었지만, 윌이나 제이는 뭔지 아는 듯했다.
"이런 건 다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노마님?"
"트레져 헌터는 마법의 직업이라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마법인가보군. 이건 다 압수하겠다."
"에엑? 왜?!"
윌이 늘어놓은 것들 중에서 절반 정도를 치워버리자 노마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독한 것들은 다 치워버린 모양이었다. 집주인이자 어른스로서 무분별한 음주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지, 윌은 강경했다.
"제이도 아직 어리지만 과실주 정도는 괜찮겠지. 이거면 됐어. 사람 수가 많으니 쓸만한 잔을 더 가져오마."
"윌리 너무해! 하지만 어린 제이나 리링을 위해 참아볼까나~"
"그러는 노마 너도 아직 다 큰 어른도 아니잖아……."
세넬이 뭐라고 하든 노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술을 들이켜도 될 만한 어른으로 딱 보이는 사람은 사실 그류네와 윌 정도였다. 모제스는 보이는 것보다 어리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세넬이나 셜리, 클로에, 노마는 거의 비슷한 나이대였으니.
월터를 줄곧 신경쓰고 있던 셜리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월터는 술을 마셔본 적 있나요?"
"땅의 민족으로 변장하고 있을 때 마시는 척하며 정보를 모았던 적은 있습니다."
"와아, 월터는 역시 대단하네요. 어른이라는 느낌?"
그야 윌만한 어른이 되려면 좀 더 관록이 쌓여야겠지만, 셜리에게 있어 월터는 물의 민족으로서 가까운 어른같이 보였다. 마우리츠는 좀 더 거리감이 있고, 월터와 곁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셜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추가로 던진 물음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월터는 몇 살인지 들은 적이 없어요. 당연히 저보다 연상일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메르네스님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네, 저는……."
월터의 대답을 듣고는 노마보다 세넬이 먼저 반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먹던 빵이 목에 걸릴 뻔한 기세로 일어난 세넬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옆을 쳐다보았다.
"진짜야?!"
"그 반응은 뭐냐, 세넬."
"아니, 그게, 너 말이야……."
그 얼굴에 나랑 동갑이라고 하면 믿겠냐?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세넬이 의문스런 표정으로 월터를 쳐다보자, 월터도 응수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라."
"그, 조금 믿기 힘든 느낌이네. 월터가 나나 쿨릿지와 비슷한 나이였다니 말이야."
클로에가 거들자 세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류네를 빼고는 거의 그런 분위기였다. 셜리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메르네스의 친위대장으로서 마을에서 인정 받는 월터가 오빠과 동갑이라니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월터는 클로에보다는 세넬이 이러는 쪽이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놈과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수준이 비슷해질 거라는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지금 시비 거냐? 아니, 그냥 좀 놀랐다고. 네 얼굴이나 태도를 보면 누가 나랑 동갑이라고 생각하겠어."
"나이 따위보다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책임을 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아, 그래서 월터님은 세넬님보다 충실히 책임을 지기 위해 그간 그렇게 행동하셨던 거군요?"
제이가 쿡쿡 웃으며 끼어들었다. 반어법에 가까운 말이었다. 월터가 그동안 이 일행 사이에서 도움이 되었던 적도 많지만, 분위기를 싸늘하게 얼려버린 적도 한두 번은 아니었던 탓이었다. 스스로의 행적을 모를 리 없는 월터가 제이를 노려보았다.
"그걸 다 받아주신 세넬님도 뭐 예전에 비하면 어른스러우셨던 게 아닐까요."
그럼 그 예전에는 어른스럽지 않았다고 지적당한 듯한 세넬도 이쪽을 노려보자 제이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재밌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모제스가 끼어들었다.
"킥킥킥킥킥! 쇠똥이랑 월래리가 이러지 않으면 섭할뻔 했어야. 월래리가 쪼까 있어보이는 건 사실이구마이, 케도 싸나이가 고딴 건 중요치않아부러."
"이쪽 산적이야말로 시비를 거는 건가?"
"걸 거라면 승부를 걸어야제, 삼삼하니 월래리도 한판 해볼텨?"
"오, 나왔습니다 모돌이 선수의 승부 근성! 오늘은 세네세네뿐만 아니라 워리워리까지 끼워넣은 삼파전이 될 것인가!"
"저, 저기……."
신나게 관전자 모드로 들어간 노마가 중계를 시작하자 맨 처음 월터에게 발단을 던졌던 셜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은 것은 윌이 잠시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세넬과 월터와 모제스가 시선을 맞부딪치는 사이에 남아있는 상식인은 클로에뿐이었다.
"노마도 참…… 거기 좀 적당히 해. 즐거운 자리잖아? 축배를 들어야지."
"클로에는 가만히 있어. 월터가 사사건건 저러는 거 원래도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내가 뭘 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그런 점이 언제나 마음에 안 들었다고! 그냥 동갑이라 놀랐다고 한 마디 했더니 또 그런 소리나 하고 말이야."
"너야말로 사사건건 메르네스님이나 내 일에 참견하지 않았나."
"셜리나 셜리 옆에 있는 네 일에 참견하는 게 그렇게 문제였으면 모든 일을 너 혼자서 해결했으면 되잖아!"
"세넬님도 전에는 전부 혼자서 해결하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제이 너도 좀 가만히 있어봐!"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요?"
"나도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 날 이후로 이런 문제를 가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그럼 오늘이구마이. 심판은 내가 해줄탱게 한판 붙어부러."
"플레이! 플레이! 아무나 이겨라!"
"그러니까 셋 다 그만 하래도! 노마 너도!"
"아아, 오빠…… 월터……."
"다들 사이가 정말 좋구나, 후후."
셜리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한탄하는 뒤편에서, 다행히도 잠들지는 않은 그류네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류네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들이 이렇게 모여있고, 그 때 살려내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다툴 일도 없었던 사람마저 함께 있다. 사람보다 사람이 아닌 것에 조금 더 가까운 존재기는 해도, 그류네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울고 웃고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모인 집 안을,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결코 눈에 담지 못했을 풍경을 보며 그류네는 인기척을 거의 내지 않은 채 살며시 다가갔다.
"에잇."
"그, 그류네 누나!"
"뭐냐."
"사이 좋은 사이에 나도 같이 있고 싶어서."
"이게 사이가 좋아보여?!" "무슨 헛소리를!"
그류네에게 폭 끌어안긴 세넬과 월터가 어연 일인지 마음을 맞추어 대꾸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류네가 헤실헤실 웃고 있자 그류네의 품에 들어가지 못한 모제스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제이는 다른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세넬님과 월터님의 승부, 오늘이야말로 가려지나 싶었는데요."
"오늘이야말로, 하지 말아야하는 거겠지."
"앗, 레이너드."
클로에의 눈에 집 구석진 곳에서 먼지 쌓인 잔을 꺼내 닦아온 윌이 제이보다 바람처럼 나타나 순서대로 머리를 쥐어박는 것이 보였다. 제이를 지나 제이 곁의 모제스, 중간에서 바람을 넣던 노마,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류네의 팔에 끌어안긴 월터와 세넬에게 양손으로 집주인의 응징을 내린 윌이 선언하듯이 설교했다.
"정말이지…… 다들 축하주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해주려고 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군. 세넬, 아직도 셜리 관련으로 조급해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거냐. 노마, 여기서 장난을 치는 건 어느 정도 봐준다만 트레저 헌터 일을 하면서까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모제스, 마수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조금 차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산적처럼 굴면 나도 곤란하다. 제이,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건 지금만이라도 관둬라."
"알았다고." "알았어." "알았구마이." "네, 죄송해요."
"그리고 월터."
윌에게 거역하지 않고 얌전한 대답들이 나오는 사이, 이런 식으로 얻어맞은 건 처음인 월터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월터에게도 윌의 말이 날아왔다.
"네가 물의 민족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다는 알지 못하지만, 여기 있을 때의 너는 그냥 월터다. 제멋대로나 무례하게 굴면 누군가는 기분 나빠할 거고, 얌전하게 참여한다면 누군가 기뻐하겠지. 정말로 네가 바뀌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면 생각해둬라."
"……."
무언가 고민한 바가 있어서 셜리를 여기까지 따라왔을 월터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윌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클로에가 마지막 한숨을 쉬었다. 월터와 세넬을 놓아준 그류네가 걸어가 병을 집어들었다.
"모두에게 줄게!"
그건 그류네 나름대로 모두에게 주고 싶은 축복이었다. 잔에 고운 색의 액체가 차오르고, 앉아있는 사람의 숫자는 총 아홉. 노마가 잔을 높이 들어올리려다가 멈추었다.
"건배할 때 뭐라고 외치지?"
"음, 모두가 건강하기를……?"
셜리의 제안은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 식상했다. 그걸로도 좋다고 할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제이와 모제스는 아닌 것 같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저 사실, 오늘 분위기 꽤 마음에 들거든요. 월터님은 역시 의외긴 하지만요."
"히요오오오옷! 그라믄 담에 볼 때는 더 큰 사람이 되어불자고 하믄 되겄어."
"그것도 건배할 때 할 건 조금 아닌 것 같다만, 으음…… 막상 생각하니 좋은 건 잘 떠오르지 않는군."
"야, 월터. 무슨 생각 없어?"
일시 휴전 상태에 들어간 줄만 알았던 세넬이 먼저 월터에게 말을 걸자 월터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뭐든 상관 없으니 나에게 묻지 마라."
"그래도 저, 월터가 잔을 들어주려고 해서 기뻐요.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꽤 고민했던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메르네스님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월터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 기세였다. 그럴 거면 왜 따라온 거야, 세넬은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시고 싶은 듯한 노마와 분위기만은 이미 술독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모제스, 평소보다는 아주 조금 들뜬 제이, 해리엇의 귀가를 걱정하며 모두를 신경써주고 있는 윌, 진지하게 건배 대사를 고민하고 있는 클로에.
"클로에는?"
"나? 나는…… 제이가 했던 말이 꽤 마음에 들어서 말야. 다음이라는 거. 우리들이 설마 이렇게 다시 모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으니까, 오늘 모이자는 제안에 다들 어떻게든 유적선으로 온 거지?"
그들이 공유했던 소중한 추억이 있는, 평생 잊지 못할 터전이 될 섬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만난 오늘과, 또 만나게 될 언젠가를 기념할 수 있는 말이 있으면 좋겠어."
"오오 꾸띠, 멋진 말을 하잖아!"
노마의 칭찬에 쑥쓰러워진 클로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무슨 말이든 상관 없었을 것이다. 지금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말의 형태는 어떤 것이 되어도 마음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더더욱, 모두에게 잔을 돌린 그류네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 붙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다들, 나는 말이야~ 이게 좋다고 생각해."
월터를 제외한 모두가 그류네의 말을 듣고 그렇구나! 라고 대답하는 사이 월터는 뚫어지게 그류네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없었을 사람, 그리고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데에서 월터와 그류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월터는 그류네의 제안을 조금은 공감하고 말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광적익에서 쓰러졌던 그 날, 땅의 민족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거기서 죽었더라면 결코 겪을 수 없었을 순간이다. 식인 유적에서 그 날 꼭 세넬 일행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따뜻한 곳에 있을 수 없었을 순간이다.
그렇게, 월터도 그류네도 여기에 함께 있다.
선창은 그류네가 세넬에게 맡겼다. 노마나 윌이 아닌 것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어색해하던 세넬이 잔을 높게 들어올리고 외쳤다.
"우리들이 여기에 있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 월터마저도 크지 않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기적의 날을 위하여!"
인연은 우연으로부터 쌓아올려져서, 지금 우리들에게는 서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도저히 상상도차 할 수 없는 필연이 되고 만다.
그런 인연들이 수없이 갈래를 뻗는 동안 이별이라는 위기를 몇 번이나 우리들은 넘겨왔어. 이렇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줄 수 있는 자리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죽을 뻔 하거나 소멸하려고 했던 두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큼 충분히 기적적인 일이라고.
그들은 해리엇이 돌아오고도 계속될 파티를 지나 내일이 찾아오면 제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길을 걷겠지만, 언젠가 찾아올 다음 기적의 날을 바라는 마음에 흔들림은 없었다.
유우키는 꿈이 우주 제일, 아니 꿈이 우주에 가는 것인 소녀였다. 이미 이루긴 했지만, 더 정확히는 우주 비행사가 되어서 가는 소원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우주에 가려면 배워야할 것들은 너무도 많았다. 그 첫 통과관문으로서 일단 무사히 대학 진학을 마쳐야하는데, 우타호시 켄고는 유우키가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믿으니 도와주는 거긴 한데, 절망적이지 않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시험까지 나누어놓았다는 계획에 대해서 다시 얘기해주겠어?"
"응, 그 때까지 여기랑 여기를 공부하고, 이 책을 완전히 복습하고, 저걸 다 외우면……."
계획 자체에 큰 문제는 없었다. 하루 이틀 게으름을 피우면 무너지기 딱 좋은 시기일 뿐이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수업에 자주 빠졌었다는 이유로 문제아 취급도 숱하게 받아본 켄고였지만 거기에 얽힌 많은 사정은 해결되었다. 우타호시 켄고는 시험 날 교통사고라도 나지 않는다면 무사 합격할 인재였다. 그러니 이렇게 친구를 과외해주며 공부하는 것도 가능하다만.
"유우키, 잘 들어."
켄고는 눈앞의 상대에게는 통상적인 교수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 년 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정통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면 켄고가 반드시 이해하는 것을 유우키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어도 되면 괜찮다. 머리에 들어있기만 하면 유우키는 펼쳐보일 수 있다. 그러니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 도와주는 것이 켄고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하는 거야. 모르겠거나 좀 더 효율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나한테 바로 물어보고."
소녀의 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나는 장소 가운데 펼쳐진 작은 탁자 앞에서 책에 둘러싸인 유우키가 옛썰! 하고 웃어보인 뒤 책을 펼치고 펜을 들었다. 본인의 공부는 그다지 급하지 않은 켄고는 유우키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쩍 동태를 살폈다. 켄고가 외우고 있는 책을 보고 있기에 그 앞 장에서는 무슨 내용이 있었냐고 묻자, 유우키는 바로 대답했다.
"저항 값이 존재할 때의 계산식은──."
"좋아, 계속 읽어도 돼."
중요한 부분에 몇 번이고 줄을 그었을 펜을 빙글빙글 돌리는 유우키는 공부가 시급하다며 켄고를 부른 것치고는 신이 난 듯했다. 궁금했지만 혼자서 해명하지 못한 것들을 꼼꼼하게 물어보는 모양을 보니 정석적으로 공부하는 방법도 전보다 많이 알게 된 듯했다. 예전이라면 켄고가 ABCDEF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FEDCBA로 이해하여 다른 사람들을 당황시켰을 유우키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