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시님께서 총 9인이 등장하는 올캐릭터 후일담 장문 커미션을 의뢰해주셨습니다.
더불어 전문 공개도 허가해주셔서 기쁜 마음으로 공개합니다.
9인의 구성과 내용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웨르테스 가운데에 위치한 집은 그간 바빴던 세넬이 기억하는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여길 몇 년씩 못 본 것도 아닌데,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며 세넬은 가볍게 문을 두드린 뒤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열고 들어갔다. 집주인과 그 정도는 해도 괜찮은 사이였으니.
"윌, 있어?"
"세넬인가?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보군."
"내가 조금 일찍 온 것 같기는 한데…… 뭐하는 거야?"
"해리엇이 가마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해서 살피는 중이었다.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는 모양이라…… 세넬도 왔으니 나중에 하지."
웅크리고 있던 큰 등이 이쪽으로 돌아섰다. 가마를 만지던 손에서 장갑을 뺀 윌이 그제야 세넬을 마주보며 제대로 인사해주었다.
"어서 와라, 몇 주 못 봤다고 굉장히 오래간만인 기분이군."
"나도 그래."
"네 활약상은 익히 들었다."
"별 거 아닌걸."
유적선 등지에서 마린 트루퍼 일을 다시 시작한 세넬 쿨릿지는 유적선 등지에서 그 실력에 대해 소문이 자자했다. 물 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물의 민족만큼이나 뛰어난 수영 솜씨라는 말까지 윌에게 들려온 적이 있었다. 윌은 진심으로, 그간 숱한 사건을 겪으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성장한 세넬을 칭찬했다.
"유적선에 살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든든한 트루퍼가 있는 건 정말 안심되는 일이지."
"그러는 윌이야말로 대단한 학자잖아. 연구하던 건 잘 되어가?"
"으음, 해리엇까지 도와주고 있지만 영 완성되질 않아서 말이다."
"해리엇은 없어?"
"오늘은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너희들이 전부 모일 때쯤엔 돌아오겠다고는 했어."
유적선에서 박물학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윌은 새로 채집한 표본의 분석인지 무엇인지에 애를 먹고 있다고 했다. 세넬로서는 전부터 몇 번씩 들어도 잘 모르는 이야기였기에 그냥 윌이 곤란하구나, 하는 정도로 넘겼다.
"슬슬 시간 약속에 늦지 않는 사람들이 올 때가 됐겠군."
"실례할게, 레이너드."
집주인에 대한 인사를 잊지 않으며 들어온 사람은 세넬과 윌이 아는 대로 허리 한 편에 검을 찬 채였다. 세넬이 가진 기억 속의 소녀 기사는 조금 더 성숙해진 채 웃고 있었다.
"오래간만이야, 클로에."
"아, 응. 먼저 와 있었구나."
세넬을 보며 수줍게 인사한 클로에가 자리에 앉았다. 서 있던 세넬도 윌이 권한 곳에 앉은 뒤 클로에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유적선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한 차례 끝난 뒤, 클로에는 기사로서의 신념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버리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홀로 여행을 떠났던 터였다. 진짜 기사 작위보다 중요한 마음가짐을 실천하겠다는 그 행동에 감명받은 사람들이 꽤 되는지, 트루퍼로 일하며 세넬은 종종 클로에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렇게 셋만 있으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네."
"윌이랑 클로에랑 셋이서 산적 아지트에 갈 때였나?"
"클로에가 우리를 산적으로 오해했었지."
"부, 부끄러우니까 그 얘긴 하지 말아줘."
클로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그렇게 행동하기 전에 상대를 조금 더 주의깊게 살필 수 있게 되었다며 클로에는 말했다.
"그 뒤에 모두와 유적선에서 많이 배웠으니까 말이야."
"그 뒤라……."
"짜자잔! 세이프! 무사도착!"
많은 일이 일어난 뒤에 조금도 '조용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배우지 못한 듯한 사람이 문을 박차고 나타났다. 집주인이 한숨을 쉬었다.
"노마…… 문은 손으로 여는 거다. 특히 다른 사람의 집 문은."
"윌리에 대한 반가움을 좀 세게 표현해봤어! 난 오래간만에 돌아왔잖아. 야호! 세네세네랑 꾸띠는 제대로 도착해있었네? 나까지 약속을 지키는 올바른 사람들이야!"
클로에가 시각을 확인해보니 딱 그랬다. 이제부터 노마보다 늦게 오는 사람들은 지각이라고 놀림당할 게 빤히 보여서 세넬은 가장 많이 당할 사람의 얼굴을 잠깐 떠올려보았다.
"모돌이는 그렇다치고 제리도 늦을 줄은 몰랐는데? 그리고 세네세네가 있는데 리링이 없으면 이상하다구."
"셜리는 물의 민족 마을에서 일이 있다고 했어."
물의 민족과 땅의 민족이 화합할 수 있다고 믿는 셜리는 물의 민족과 다른 사람들을 잇는 다리가 되기 위해 여전히 노력하고 있었다. 물의 민족은 잊을 수 없는 역사가 있는 만큼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유적선 내의 권리를 온건한 방식으로 찾기 위해서는 셜리의 방식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조금은 인정한 터였다. 세넬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노력하는 셜리를 계속 지켜보고, 응원해주고 있었다.
수선을 떠는 노마가 반가운지 클로에가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노마는 까딱하면 못 올 줄 알았는데 만나서 다행이야."
"후후후, 내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꾸띠! 세계 최고의 트레저 헌터는 못 가는 곳이 없다구! 대륙에서도 유적선까지 슝하고 이렇게 왔습니다!"
정말로 세계 최고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적선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의 트레저 헌터로 성장하고 있는 노마는 관련자들 사이에서 꽤 이름이 있었다. 단, 좋은 이야기보단 시끄럽고 곤란한 쪽의 명성이 아직은 더 높다는 게 문제였다. 늘 그랬듯이 너스레를 떨며 달라붙는 노마를 클로에가 부드럽게 웃으며 상대하는 사이 누군가가 노마보다 화려하게 문을 열었다.
"떠들썩한 걸 보니 잘들 있었구마이."
"모제스!"
"여 쇠똥이, 간만에 나가 몸이 근질근질헌디 이따가 한판 워뗘?"
어깨에서 뚜둑거리는 소리를 내며 모제스가 세넬의 옆에 앉았다. 호기롭게 웃은 세넬이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유적선에 있었는데도 모제스와 본지도 꽤 됐었구나."
"쪼매 돌아당겨도 허벌나게 바쁜 게 인생인겨."
기트를 떠나보낸 이후 유적선, 아니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마수들과 효과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멋진 방법을 찾겠다는 목표를 최근 세운 모제스는 학자인 윌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딜 또 다쳤는지 세넬이 모르는 상처자국이 몇 개 늘은 듯했다. 세넬이 있는 곳에도 가끔씩 나타나서 쓸 만한 거 없냐고 두리번거렸기에 세넬과 모제스는 최근에 본 적은 있는 편이었다.
"바쁜 모제스님이라니, 예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할 일이 없어보이는 분이셨는데 말이죠."
"우와아앗! 짹짹이 너 시방 온 것이여?!"
짹쨱이는 왜 없냐고 묻기도 전에 깜짝 놀라 바닥으로 엎어질 뻔한 모제스의 옆에서 정말 바람처럼 나타난 바람의 제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떠들석해진 틈을 조용히 파고든 것이 제이의 특기다웠다. 생글생글 웃으며 제이가 고개를 숙여 바르게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꼭 받아야하는 중요한 편지가 있어서요."
"정보 관련인가?"
"뭐 그렇죠."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유적선에서 가장 유명한 정보상답게 제이는 이제 유적선뿐만 아니라 세계의 동향을 주목하고 관찰하는 전략가로서 알음알음 알려졌다. 그 어느 국가나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위해 지략을 짜내는 제이를 적으로 돌린다면 실로 공포스러운 일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키가 조금 자란 듯한 제이였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여러분을 만나러 간다니까 모프모프족 모두가 안부 전해달라고 했어요."
"그거 고맙군. 그러고보니 다음에는 모프모프족을 만나러 가고 싶었는데, 괜찮나?"
"윌님의 이번 연구가 끝나면, 이었죠? 저나 모프모프족이 가능한 만큼 협력할 테니 다음에 얘기하죠."
"우와, 거의 다 모였네! 리링만 오면 되나?"
노마가 신나하며 벌떡 일어나 방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제이가 이때라는 듯이 노마가 앉았던 자리를 차지했다. 노마가 늘 하던 대로 괴상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세계 제일~ 트레저 헌터~ 오늘은~ 모두모두~ 모여서~ 즐겁게~ 즐겁게~ 다같…… 이?"
"왜 그래, 노마?"
미리 준비해둔 차를 가져온 윌을 도와주고 있던 세넬이 갑자기 멈춘 노마에게 시선을 돌리자, 노마의 등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그그그그게."
"노마, 무슨 일이야."
찻잔에 손을 가져가기 전에 클로에가 노마 옆으로 가보기도 전에 노마가 펄쩍 뛰어올랐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구리리 언니!! 못 오는 거 아닌가 했는데!"
유령처럼 거실 한쪽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킨 여자의 인영이 몸을 돌렸다. 화사하게 웃는 모습이 아름답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집주인도 가장 처음 온 사람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림자가 태평하게 인사했다.
"언제부터일까……? 처음부터?"
"윌, 몰랐어?"
"……전혀 몰랐다. 가마를 보고 있다가 느낀 인기척은 세넬 네가 첫 번째였으니."
놀라기를 멈춘 노마가 바닥에서 일어난 그류네를 덥썩 끌어안으며 집 전체가 울릴 듯이 방방 뛰었다.
"보고 싶었단 말이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달라구!"
"으응, 와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오고 나니까 너무 졸려서 그만."
'그래서 바닥에서 자고 있었던 거야……?'
모두의 황당함은 뒤로 하고 노마가 그류네를 끌어다가 앉혔다. 정이 많은 노마가 유독 그류네를 이렇게 반기는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 말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셜리를 포함해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전원이 겪었던 슈발츠와의 격렬한 전투 이후, 모두는 스스로가 어떻게 될지 알고 결단을 내렸던 그류네를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그류네를 다시 만난 것은, 기적이라고 할 만한 선물이었다.
여전히 보안관 취급을 받는 윌이 유적선 어딘가에서 구조된 정체불명의 여성을 데리러 갈 때만 해도, 당연히 그게 그류네라고 예상했을 리가 없었다. 익숙한 실루엣을 보고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윌은 잠들어있는 그류네를 데리고 절차를 밟아 병원에 눕힌 뒤, 제이를 불러 동료들 모두에게 급하게 연락을 넣었다. 당시 유적선에 있던 제이, 세넬, 셜리, 모제스는 달려와서 이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대륙에 있어서 소식이 닿는 데에 조금 시간이 걸렸던 클로에는 여행 일정을 바꾸어 바로 달려와주었다. 노마가 가장 멀리 있었기 때문에 노마는 그 당시에 바로 그류네를 보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그류네가 깨어난 뒤 만난 적이 없는 것도 아니건만, 이렇게 그류네를 볼 때마다 유독 반가워하는 노마였다.
한참이고 잠자는 공주처럼 원인 불명으로 누워있던 그류네가 눈을 뜬 것은 조금 시간이 흘러서였다. 어째서 여기 있는 걸까, 눈을 감을 때 작별을 고했던 사람들이 보이는 걸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류네를 껴안은 셜리의 눈시울이 뜨거웠다.
원래 사람이 아닌 존재였고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살아있게 된 그류네는 유적선을 말 그대로 정령처럼 떠돌면서 지내는 모양이었다. 윌이나 제이도 전혀 그류네의 거취를 알 수 없었지만, 웨르테스 사람들은 이곳 저곳에 뜬금없이 나타나는 그류네에게 완전히 익숙해졌는지 마치 자연현상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어쩐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류네의 특징 덕분일지도 몰랐다.
"알았지 구리리 언니? 오늘 모임 끝나기 전까지는 자면 안 돼!"
"으응, 노력은 해보고 싶지만……."
노마가 졸랐지만 그류네의 대답은 석연치 않았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부작용이라도 되는지, 그류네는 대부분의 시간을 처음 발견되었던 때와 슈발츠와의 결전 이후 사라졌다가 발견되었을 때처럼 자고 있었다. 그럴 때엔 이상할 정도로 존재감이 옅어져서, 조금 전의 노마처럼 보고 깜짝 놀라다가도 그게 그류네라는 걸 알면 그럴 수도 있다고 유적선 사람들은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신에 가까운 존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취급이었지만, 그류네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다들 약속된 사람 수에 그류네를 예외로 취급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전부 모였다는 생각에 다시 노래를 부르려는 노마, 최근 새로 배운 전투 기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클로에과 세넬, 해리엇의 귀가를 신경쓰는 윌, 모제스가 최근 마수들을 상대하다가 무슨 얼간이 같은 짓을 했는지 알고 놀리는 제이, 모제스가 뭘 하려고 했는지 알면서 제이가 일부러 그런다는 걸 눈치 채고 받아치는 모제스, 꾸벅꾸벅 졸 것처럼 고개를 갸웃갸웃거리는 그류네, 그 사이로 예의바르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해리엇이라면 굳이 문을 두드리진 않을 거고……."
"이뿐이겄구만."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은 셜리뿐이니, 윌과 모제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세넬이 성큼성큼 걸어가 문고리를 잡았다.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제이가 곱게 닫아놓은 문을 당기고, 세넬은 거기 서 있는 사람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너."
"아, 안녕, 오빠. 들어가도 될까……?"
세넬이 문을 열 줄 몰랐기 때문에 한껏 어색하게 웃고 있는 셜리의 곁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금발의 남자가 있었다.
"당연하지."
"실례하겠습니다……."
동료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다만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이 셜리까지만 오면 모두 모인다고 했던 것은, 그 남자는 이런 자리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다들 생각한 탓이었다.
오늘도 그 얼어붙을 듯이 차가운 표정에 익숙해진지 꽤 된 세넬은 셜리가 들어온 뒤에도 그 자리에 서 있는 남자에게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너도 얼른 들어와, 월터."
물의 민족의 전도유망한 청년이자 메르네스의 친위대장, 그리고 차기 지도자로 거론되는 남자 월터는 세넬을 향한 날카로운 눈빛을 꺼뜨리지 않은 채 세넬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월터를 한번에 받아들인 사람은 셜리 정도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메르네스로서 셜리가 그 때 말했듯이, 어째서 물의 민족과 땅의 민족은 이럴 수밖에 없었는가…… 그 해묵은 증오와 갈등을 떨쳐내는 것은 월터에게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었으며, 세넬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월터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온 몸을 던져 메르네스를 지키려고 했던 월터를 빈사상태에서 살려낸 것은 셜리의 지극정성과 브레스계 조술을 사용하는 다른 동료들의 기적이라고 할 만한 노력 덕분이었다. 한참 후에야 의식을 되찾은 월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광적익으로 땅의 민족을 멸망시키지 못했다는 것도 믿지 못한 채 절규했다. 물의 민족이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메르네스, 창아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셜리는 그런 월터의 손을 잡고 창아의 의지를 새로이 전하며 자신의 의견도 말했다. 증오로는 낳을 수 없는 미래를 찾고 싶다고. 만나버리고 만 이상, 물의 민족과 땅의 민족이 이 땅 위에 존재하는 새로운 미래를.
시간이 지나고 진정한 월터는 그것이 창아의 의지라면, 따를 수 있다는 결론을 조심스럽게 셜리에게 전달했다. 다른 물의 민족들보다는 늦은 결론이었지만, 메르네스의 친위대장이었던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준 것은 물의 민족이 가진 태도를 바꾸는 데에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셜리는 무척이나 기뻐했고, 그 소식을 들었던 세넬은 '잘 됐네' 하고 짧은 감상을 표했다.
문제라면 그 다음이었다. 깊게 새겨진 증오를 의식적으로 희석하려고 해도, 메르네스가 땅의 민족에게 노려졌던 때를 기억하는 월터는 셜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려고 할 때마다 강경한 눈초리를 보냈다. 물의 민족 마을과 웨르테스를 오가는 셜리가 곤란해한 것은 험악한 표정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는 월터가 여전처럼 호위를 핑계 삼아 때로 동행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그래도 말투가 그리 곱지 않은 세넬이 월터에게 대놓고 셜리가 불편해하니까 적당히 하라고 말했을 때에는 다들 한 마디씩 거들게 되었다. 클로에는 뭐든 지나치면 좋지 않다고 조언했다. 노마는 자꾸 그러면 페로몬 봄버즈를 소환하겠다고 놀렸고, 그 옆에서 윌이 노마에게 꿀밤을 먹인 뒤 피차 좋지 않았던 일들을 잊을 수는 없어도 조금씩 함께 걸어가보자고 말했다. 모제스는 마수와 인간도 통할 수 있는데 인간과 인간이 통하지 못할 이유가 뭐 있겠냐며 그답지 않게 철학적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제이는 물의 민족이 메르네스와 창아의 의지를 따라 방향을 바꾸기로 한 이상 당신 혼자 그렇게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를 던졌다. 그리고 천연 기운이 넘치는 그류네에게는 월터마저도 거역하지 못해서, 셜리를 따라왔다가 겉도는 월터를 끌어다가 처음으로 동료들 사이에 앉혔던 것은 그류네였다.
물의 민족도 땅의 민족도,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에요. 저는 오빠와 동료분들에게서 제가 배우고 느낀 것들을 월터도 알아줬으면 해요.
그게 메르네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월터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눌러가며 땅의 민족들 사이에 함께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었다. 땅의 민족에게 진 목숨 빚을 수치스럽게 여기기보다, 자신의 뜻에 함께 해주길 바라는 셜리에게 월터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물의 민족 마을에서 딱히 급한 일이 없을 때마다 친위대장으로서 셜리와 동행하기 시작했던 월터는 그렇게 전부는 아니어도 세넬과 동료들이 겪은 사건의 일부가 되었다. 함께한 것도 셜리에게 듣기만 한 것도 있었지만, 월터는 땅의 민족을 보고 느꼈다. 윌의 가족애, 노마의 굴하지 않는 노력, 복수심을 극복해낸 클로에, 소중한 것을 떠내보내는 모제스, 지키고 싶은 것 앞에서 물러날 수 없는 제이, 스스로 내린 결단을 향해 망설이지 않고 전진한 그류네와 그녀가 떠나는 것을 끝까지 존중했던 셜리와 동료들을.
그리하여 월터가 땅의 민족에 대해 무조건적인 증오심을 표하는 모습은 거의 없어졌지만, 메르네스를 뺀 누구에게나 가차없이 말하는 성격은 여전했다. 그래서 꼭 함께 있어야하는 모험길쯤 되지 않으면 셜리를 남겨둔 채 자리를 피하기도 해서, 노마나 모제스나 그류네가 넉살 좋게 끌고 와야 마지못해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앉아있곤 했던 월터가 이렇게 단체 모임 자리에 찾아와 문을 두드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세넬도 잠시 할 말을 잃었던 것이었다.
그류네가 돌아온 이후 이렇게 다같이 모이는 것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의 중요한 자리였다. 월터가 당당하게 들어오는 것을 보고 노마가 셜리의 귀에 속삭였다.
"리링, 워리워리가 웬일이래?"
"저는 혼자 가고 싶다고 했는데……."
물의 민족 마을에서 볼 일이 끝난 이후 셜리가 출발하려고 하자 월터가 동행하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오늘은 이런 성격의 모임이니까, 라고 말하면 월터가 마을에 있겠다고 할 줄 알았던 셜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사실 전원 소집이라면 월터가 못 올 이유도 없긴 하고, 오는 길에 좀 신경쓰여서 물어보긴 했어요."
"뭐라고 했는데?"
흥미롭다는 듯이 클로에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셜리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조금은 바뀌었으니까요, 라고요."
창아만큼이나 큰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그류네와 슈발츠의 사건을 마지막으로 세넬 일행과 별로 본 적이 없던 월터는 그동안 많이 생각한 듯했다. 셜리가 봐주었으면, 판단해주었으면 했던 것들에 대해 결론을 내린 월터가 눈앞에 있었다.
"월터도 이젠, 여러분을 땅의 민족이 아니라…… 함께 싸우고, 같은 기억을 공유한 사람들로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정말 기뻐요. 월터가 저 대신 문을 두드렸을 땐 괜찮을까 싶어서 놀라긴 했지만요. 오빠가 놀란 걸 보니까 역시 조금 그랬던 것 같네요."
"……다 들립니다, 메르네스님."
월터가 핀잔을 주듯 한 마디 하자 역시 다 들은 모제스가 한 팔로 월터의 목을 끌어당겼다.
"월래리 니도 역시 꽤 좋은 놈이었구마이! 이뿐이의 정성이 통할 줄 알았구만."
"놔라."
칼같이 월터가 모제스를 떼어내고 옆으로 물러났다. 제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월터님은 월터님이네요. 뭐 저희를 예전처럼 보시지 않는다는 건 느끼곤 있었지만, 기왕 이렇게 오신 거 좀 더 솔직해지시라고요?"
"제이 너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어머, 그러게. 상냥한 제이니까."
"윌님과 그류네님은 꼭 이럴 때 아픈 데를 찌르신다니까요……."
늘어난 사람 수만큼의 의자를 가지고 온 세넬이 제이의 곁에서 웃었다. 월터의 자리는 맨 끝이자 셜리의 옆이었다. 월터와 미운 정인지 싸운 정인지 들어버린 세넬은 이젠 제법 아무렇지 않게 그 곁에 앉을 수 있었다. 월터가 불편해할지는 몰라도 말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답게 때로는 전원이 참여하는 화제가 나왔다가, 때로는 바로 옆 사람과 실없는 얘기를 하기도 하면서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월터가 앉아있는 곳만 조금 싸늘하기는 했지만, 집주인이 미리 준비해두었다가 내온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세넬이 해리엇이 윌을 도와서 만들었다는 빵이 맛있다고 느끼며 우물거리는 동안 셜리는 아직도 월터를 신경쓰고 있는지 조금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벌떡 일어난 노마가 외쳤다.
"윌리! 뭔가 허전하지 않아?"
"뭐가 말이냐."
"이런 날에는 역시 건배를 해야지! 이왕이면…… 맛있는 술로?"
"이 집에 그런 게 제대로 있을 것 같나?"
있어도 요리에 쓰는 술이겠지, 윌의 대답에도 노마는 굴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럴 줄 알고 내가 가져왔어!"
짐가방에서 주섬주섬 병을 꺼낸 노마가 뿌듯하게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술에 대해선 잘 모르는 세넬이나 클로에, 셜리로서는 그냥 술인가보다 싶었지만, 윌이나 제이는 뭔지 아는 듯했다.
"이런 건 다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노마님?"
"트레져 헌터는 마법의 직업이라구!"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마법인가보군. 이건 다 압수하겠다."
"에엑? 왜?!"
윌이 늘어놓은 것들 중에서 절반 정도를 치워버리자 노마가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래도 독한 것들은 다 치워버린 모양이었다. 집주인이자 어른스로서 무분별한 음주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인지, 윌은 강경했다.
"제이도 아직 어리지만 과실주 정도는 괜찮겠지. 이거면 됐어. 사람 수가 많으니 쓸만한 잔을 더 가져오마."
"윌리 너무해! 하지만 어린 제이나 리링을 위해 참아볼까나~"
"그러는 노마 너도 아직 다 큰 어른도 아니잖아……."
세넬이 뭐라고 하든 노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술을 들이켜도 될 만한 어른으로 딱 보이는 사람은 사실 그류네와 윌 정도였다. 모제스는 보이는 것보다 어리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고, 세넬이나 셜리, 클로에, 노마는 거의 비슷한 나이대였으니.
월터를 줄곧 신경쓰고 있던 셜리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월터는 술을 마셔본 적 있나요?"
"땅의 민족으로 변장하고 있을 때 마시는 척하며 정보를 모았던 적은 있습니다."
"와아, 월터는 역시 대단하네요. 어른이라는 느낌?"
그야 윌만한 어른이 되려면 좀 더 관록이 쌓여야겠지만, 셜리에게 있어 월터는 물의 민족으로서 가까운 어른같이 보였다. 마우리츠는 좀 더 거리감이 있고, 월터와 곁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셜리가 별다른 생각 없이 추가로 던진 물음은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월터는 몇 살인지 들은 적이 없어요. 당연히 저보다 연상일 거라고만 생각했거든요."
"제가 아는 것이 맞다면 메르네스님과 큰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네, 저는……."
월터의 대답을 듣고는 노마보다 세넬이 먼저 반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먹던 빵이 목에 걸릴 뻔한 기세로 일어난 세넬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옆을 쳐다보았다.
"진짜야?!"
"그 반응은 뭐냐, 세넬."
"아니, 그게, 너 말이야……."
그 얼굴에 나랑 동갑이라고 하면 믿겠냐? 라고 차마 말하지 못한 세넬이 의문스런 표정으로 월터를 쳐다보자, 월터도 응수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라."
"그, 조금 믿기 힘든 느낌이네. 월터가 나나 쿨릿지와 비슷한 나이였다니 말이야."
클로에가 거들자 세넬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도 그류네를 빼고는 거의 그런 분위기였다. 셜리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메르네스의 친위대장으로서 마을에서 인정 받는 월터가 오빠과 동갑이라니 어쩐지 믿을 수가 없었다.
월터는 클로에보다는 세넬이 이러는 쪽이 더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내가 네놈과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수준이 비슷해질 거라는 생각이라도 하는 건가."
"지금 시비 거냐? 아니, 그냥 좀 놀랐다고. 네 얼굴이나 태도를 보면 누가 나랑 동갑이라고 생각하겠어."
"나이 따위보다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책임을 질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아, 그래서 월터님은 세넬님보다 충실히 책임을 지기 위해 그간 그렇게 행동하셨던 거군요?"
제이가 쿡쿡 웃으며 끼어들었다. 반어법에 가까운 말이었다. 월터가 그동안 이 일행 사이에서 도움이 되었던 적도 많지만, 분위기를 싸늘하게 얼려버린 적도 한두 번은 아니었던 탓이었다. 스스로의 행적을 모를 리 없는 월터가 제이를 노려보았다.
"그걸 다 받아주신 세넬님도 뭐 예전에 비하면 어른스러우셨던 게 아닐까요."
그럼 그 예전에는 어른스럽지 않았다고 지적당한 듯한 세넬도 이쪽을 노려보자 제이는 휘파람을 불며 딴청을 피웠다. 재밌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모제스가 끼어들었다.
"킥킥킥킥킥! 쇠똥이랑 월래리가 이러지 않으면 섭할뻔 했어야. 월래리가 쪼까 있어보이는 건 사실이구마이, 케도 싸나이가 고딴 건 중요치않아부러."
"이쪽 산적이야말로 시비를 거는 건가?"
"걸 거라면 승부를 걸어야제, 삼삼하니 월래리도 한판 해볼텨?"
"오, 나왔습니다 모돌이 선수의 승부 근성! 오늘은 세네세네뿐만 아니라 워리워리까지 끼워넣은 삼파전이 될 것인가!"
"저, 저기……."
신나게 관전자 모드로 들어간 노마가 중계를 시작하자 맨 처음 월터에게 발단을 던졌던 셜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무도 말리지 않은 것은 윌이 잠시 자리를 비운 탓이었다. 세넬과 월터와 모제스가 시선을 맞부딪치는 사이에 남아있는 상식인은 클로에뿐이었다.
"노마도 참…… 거기 좀 적당히 해. 즐거운 자리잖아? 축배를 들어야지."
"클로에는 가만히 있어. 월터가 사사건건 저러는 거 원래도 마음에 안 들었으니까."
"내가 뭘 했다는 건지 모르겠군.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평소에 그런 점이 언제나 마음에 안 들었다고! 그냥 동갑이라 놀랐다고 한 마디 했더니 또 그런 소리나 하고 말이야."
"너야말로 사사건건 메르네스님이나 내 일에 참견하지 않았나."
"셜리나 셜리 옆에 있는 네 일에 참견하는 게 그렇게 문제였으면 모든 일을 너 혼자서 해결했으면 되잖아!"
"세넬님도 전에는 전부 혼자서 해결하시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제이 너도 좀 가만히 있어봐!"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요?"
"나도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라면 얼마든지 있다. 그 날 이후로 이런 문제를 가릴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그럼 오늘이구마이. 심판은 내가 해줄탱게 한판 붙어부러."
"플레이! 플레이! 아무나 이겨라!"
"그러니까 셋 다 그만 하래도! 노마 너도!"
"아아, 오빠…… 월터……."
"다들 사이가 정말 좋구나, 후후."
셜리가 기도하듯이 두 손을 모으고 한탄하는 뒤편에서, 다행히도 잠들지는 않은 그류네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류네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얼굴들이 이렇게 모여있고, 그 때 살려내지 못했더라면 이렇게 다툴 일도 없었던 사람마저 함께 있다. 사람보다 사람이 아닌 것에 조금 더 가까운 존재기는 해도, 그류네는 이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함께 울고 웃고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모인 집 안을,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결코 눈에 담지 못했을 풍경을 보며 그류네는 인기척을 거의 내지 않은 채 살며시 다가갔다.
"에잇."
"그, 그류네 누나!"
"뭐냐."
"사이 좋은 사이에 나도 같이 있고 싶어서."
"이게 사이가 좋아보여?!" "무슨 헛소리를!"
그류네에게 폭 끌어안긴 세넬과 월터가 어연 일인지 마음을 맞추어 대꾸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그류네가 헤실헤실 웃고 있자 그류네의 품에 들어가지 못한 모제스가 아쉬운 소리를 냈다. 제이는 다른 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세넬님과 월터님의 승부, 오늘이야말로 가려지나 싶었는데요."
"오늘이야말로, 하지 말아야하는 거겠지."
"앗, 레이너드."
클로에의 눈에 집 구석진 곳에서 먼지 쌓인 잔을 꺼내 닦아온 윌이 제이보다 바람처럼 나타나 순서대로 머리를 쥐어박는 것이 보였다. 제이를 지나 제이 곁의 모제스, 중간에서 바람을 넣던 노마,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류네의 팔에 끌어안긴 월터와 세넬에게 양손으로 집주인의 응징을 내린 윌이 선언하듯이 설교했다.
"정말이지…… 다들 축하주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해주려고 했는데 아직도 한참 멀었군. 세넬, 아직도 셜리 관련으로 조급해하는 버릇이 남아있는 거냐. 노마, 여기서 장난을 치는 건 어느 정도 봐준다만 트레저 헌터 일을 하면서까지 그러는 건 아니겠지. 모제스, 마수들에 대해 공부하면서 조금 차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산적처럼 굴면 나도 곤란하다. 제이, 불 난 집에 부채질하는 건 지금만이라도 관둬라."
"알았다고." "알았어." "알았구마이." "네, 죄송해요."
"그리고 월터."
윌에게 거역하지 않고 얌전한 대답들이 나오는 사이, 이런 식으로 얻어맞은 건 처음인 월터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월터에게도 윌의 말이 날아왔다.
"네가 물의 민족에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는지 다는 알지 못하지만, 여기 있을 때의 너는 그냥 월터다. 제멋대로나 무례하게 굴면 누군가는 기분 나빠할 거고, 얌전하게 참여한다면 누군가 기뻐하겠지. 정말로 네가 바뀌었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면 생각해둬라."
"……."
무언가 고민한 바가 있어서 셜리를 여기까지 따라왔을 월터가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윌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대충 상황이 정리된 것 같자 클로에가 마지막 한숨을 쉬었다. 월터와 세넬을 놓아준 그류네가 걸어가 병을 집어들었다.
"모두에게 줄게!"
그건 그류네 나름대로 모두에게 주고 싶은 축복이었다. 잔에 고운 색의 액체가 차오르고, 앉아있는 사람의 숫자는 총 아홉. 노마가 잔을 높이 들어올리려다가 멈추었다.
"건배할 때 뭐라고 외치지?"
"음, 모두가 건강하기를……?"
셜리의 제안은 나쁘진 않았지만 조금 식상했다. 그걸로도 좋다고 할 사람도 있었지만 적어도 제이와 모제스는 아닌 것 같았다.
"다음을 기약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저 사실, 오늘 분위기 꽤 마음에 들거든요. 월터님은 역시 의외긴 하지만요."
"히요오오오옷! 그라믄 담에 볼 때는 더 큰 사람이 되어불자고 하믄 되겄어."
"그것도 건배할 때 할 건 조금 아닌 것 같다만, 으음…… 막상 생각하니 좋은 건 잘 떠오르지 않는군."
"야, 월터. 무슨 생각 없어?"
일시 휴전 상태에 들어간 줄만 알았던 세넬이 먼저 월터에게 말을 걸자 월터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뭐든 상관 없으니 나에게 묻지 마라."
"그래도 저, 월터가 잔을 들어주려고 해서 기뻐요. 여기까지 오는 데에도 꽤 고민했던 게 아닐까 싶었으니까요."
"메르네스님 좋을 대로 생각하십시오."
월터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 기세였다. 그럴 거면 왜 따라온 거야, 세넬은 어쩔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시고 싶은 듯한 노마와 분위기만은 이미 술독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모제스, 평소보다는 아주 조금 들뜬 제이, 해리엇의 귀가를 걱정하며 모두를 신경써주고 있는 윌, 진지하게 건배 대사를 고민하고 있는 클로에.
"클로에는?"
"나? 나는…… 제이가 했던 말이 꽤 마음에 들어서 말야. 다음이라는 거. 우리들이 설마 이렇게 다시 모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으니까, 오늘 모이자는 제안에 다들 어떻게든 유적선으로 온 거지?"
그들이 공유했던 소중한 추억이 있는, 평생 잊지 못할 터전이 될 섬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만난 오늘과, 또 만나게 될 언젠가를 기념할 수 있는 말이 있으면 좋겠어."
"오오 꾸띠, 멋진 말을 하잖아!"
노마의 칭찬에 쑥쓰러워진 클로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무슨 말이든 상관 없었을 것이다. 지금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말의 형태는 어떤 것이 되어도 마음은 변하지 않으므로.
그래서 더더욱, 모두에게 잔을 돌린 그류네에게는 지금 이 순간에 붙이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다들, 나는 말이야~ 이게 좋다고 생각해."
월터를 제외한 모두가 그류네의 말을 듣고 그렇구나! 라고 대답하는 사이 월터는 뚫어지게 그류네를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없었을 사람, 그리고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데에서 월터와 그류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월터는 그류네의 제안을 조금은 공감하고 말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광적익에서 쓰러졌던 그 날, 땅의 민족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대로 거기서 죽었더라면 결코 겪을 수 없었을 순간이다. 식인 유적에서 그 날 꼭 세넬 일행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따뜻한 곳에 있을 수 없었을 순간이다.
그렇게, 월터도 그류네도 여기에 함께 있다.
선창은 그류네가 세넬에게 맡겼다. 노마나 윌이 아닌 것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어색해하던 세넬이 잔을 높게 들어올리고 외쳤다.
"우리들이 여기에 있는─"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 월터마저도 크지 않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기적의 날을 위하여!"
인연은 우연으로부터 쌓아올려져서, 지금 우리들에게는 서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도저히 상상도차 할 수 없는 필연이 되고 만다.
그런 인연들이 수없이 갈래를 뻗는 동안 이별이라는 위기를 몇 번이나 우리들은 넘겨왔어. 이렇게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잡아줄 수 있는 자리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은 죽을 뻔 하거나 소멸하려고 했던 두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큼 충분히 기적적인 일이라고.
그들은 해리엇이 돌아오고도 계속될 파티를 지나 내일이 찾아오면 제자리로 돌아가 각자의 길을 걷겠지만, 언젠가 찾아올 다음 기적의 날을 바라는 마음에 흔들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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