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지의 꿈은 얼마 전에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터였다. 완전한 비행선의 완성, 로지가 이전 중앙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이었다. 콜세이트에서 마주친 모든 인연을 느끼며 로지는 감사하고 있었다.
"그 비행선으로 미답사 유적에 가는 거겠지? 에스카와 같네."
"그, 그렇게 되나요?"
"더 멀고 높은 곳으로 갈 수 있는 비행선을 만든 건 에스카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하니까. 이제 진짜 그곳으로 가는 게 목표가 된 거지. 에스카가 나를 도와줬듯이 나도 에스카를 도와야지."
반복되는 자책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를 좀먹었다. 이젠 벗어났다고 할 수 있을까, 로지는 피어오르는 연기와 귀를 찢어발기는 폭발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연성술로 만든 물건이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던 일이었으므로.
콜세이트의 로직스 픽서리오에게는 이제 그런 일이 없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로지 씨?"
반짝반짝 빛나는 듯한 초록색 눈동자로 로지를 보는 에스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혹시 차가 너무 쓴가요? 건강에 좋은 걸 많이 넣어버려서 그만……."
"아냐, 마실 수 있어. 그냥……."
그냥, 잠시 생각에 잠겼던 로지가 대답했다.
"에스카가 있으면 앞으로도 괜찮을 거 같아서."
"네? 뭐가요?"
"그냥, 뭐든지 잘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된다는 뜻이 얼마나 전달되었을까, 로지는 웃으면서 에스카를 마주 보았다.
콜세이트는 중앙에 비하면 척박한 곳이었다. 솔직히 처음 왔을 때는 조금 놀랄 정도였다. 중앙에서 오래 지낸 로지에게는 이 마을이 곧 부서지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로지의 불안했던 마음이 불러낸 착각에 가까웠고, 실제로 콜세이트는 그런 마을이 아니었다. 에스카처럼 노력하고 기운 넘치는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콜세이트가 로지는 점점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콜세이트가 고향처럼 편안한 마음이었다.
얼마 전에는 이 콜세이트에서 만난 동료 중 하나인 어윈의 꿈을 지켜 보았다.
세계의 끝, 황량하고 메마른 대지, 마치 해가 져서 영원히 뜨지 않을 듯이 어둡고 적적한 그 땅에서 로지는 어윈의 등을 보았다.
어윈의 꿈은 그날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이룬 꿈은 이제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천천히 사라져 간다. 염원하던 비행선을 만들어서 세계의 끝에 도달한 어빈은 한숨을 쉬면서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로지는 사고가 일어났던 날을 되새겼다. 이제는 그럴 수 있었다. 삶이 부서져버린 듯이 절망적인 날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옛 일을 떠올리는 자신은 쓸쓸한 표정을 짓기는 해도 웃을 수 있었다.
콜세이트에서의 나날과 지금의 꿈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에스카가 아무 말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 로지는 물었다.
"배불러, 에스카? 체했다거나……."
"아, 아뇨! 그, 저기, 방금 로지 씨가 한 말이, 그러니까."
"아."
무슨 말을 했는지 이제 깨달은 로지가 말을 덧붙였다.
"에스카와 함께 개발반에서 쭉 잘 해왔으니까, 콜세이트를 살기 좋게 만드는 일도 그렇고 미답사 유적에 가는 것도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남아있는 가게들은 방범창을 강화하고 비상전화를 걸 수 있는 장치를 계산대 가까운 곳에 두었다. 원래는 치안이 아주 좋은 도시였기 때문에 경찰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는 대비할 틈도 없이 치안이 나빠져버려 이곳으로 오고 싶어하는 경찰이 있을 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발을 멈추고 느긋하게 거리 공연을 구경할 사람들, 두 다리로 딛고 서서 기술을 뽐낼 수 있는 무대, 안심하고 거리를 다닐 수 있는 여유로움, 이런 것을 모두 포용하는 이 도시라는 공간이 타의와 자의에 의해 조금씩 사라져갔다.
무대도 관객도 중계도 유행하는 방송도 모두 사라져간다. 제대로 유지되고 있는 팀은 몇 되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팀들도 이제는 댄스 팀이 아니라 스트리트 갱으로 돌아가고 있을 지경이었다.
해체된 팀은 안타깝지만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다. 세대를 물려준 팀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그나마 가장 굳건하게 남아있는 팀 가이무와 팀 바론을 중심으로 정보를 공유하거나 공연을 계획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가장 나쁜 경우는 갱에 가까워져버린 팀들, 그 중에는 언젠가 거리에서 댄스 배틀을 했던 사람들도 분명 섞여있었다. 잭은 최근에 이 자와메를 뛰어다니며 그런 이들의 상해와 절도를 목격하곤 했다. 몇 번은 막았고 몇 번은 그냥 지켜보아야 했다. 가장 최근의 '검은 보리수' 사건에 휘말려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이들도 있었다.
문득 오늘의 댄스 연습을 빠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잭은 반도씨 몰래 동전 몇 개를 내려놓고는 가게를 나와 한숨을 쉬었다. 한번 부서지려고 했던 바론을 재건하랴 자와메에서 아머드 라이더로 드문드문 뛰어다니랴, 행동할 몸이 하나론 모자랐다. 이러다간 솜씨가 녹슬었다고 남 탓할 처지가 아니었다.
허리춤에 매달아놓은 록시드를 잠깐 빼서 잠자리 옆에 내려놓는다. 이 자와메에서 록시드는 여전히 힘의 상징이었다. 잭이 누군가의 앞에서 아머드 라이더로 변신할 때마다 그렇게 규정하는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그런 것만이 힘은 아니다. 잭은 카이토가 하던 의미 모를 말들을 얼마 전부터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주먹으로 팀을 평정하고 바론을 세운 남자가 그런 말을 하니 다들 영문을 모를 수밖에 없었지. 쿠몬 카이토는 댄스가 힘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팀원은 아마, 바론이 그만큼 최고라는 뜻으로 알아들었던 때의 일이었다.
힘은 인간을 바꾸고 세계를 변혁한다. 자와메에서 벨트를 손에 쥐었던 인간들이 어떠했던가. 잭은 매일 가지고 다니는 벨트를 잠깐 몸에서 떼어놓았다. 지금은 이걸로라도 자와메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노력하는 범위가 이것만은 아니다. 잭은 팀 바론을 관두지 않았다. 팀원들이 바라보고 있어서나, 페코가 아직 불안한 눈치여서는 아니었다. 잭은 이번 기회에 그 무언가가 가진 힘을 직시하고 싶었다.
네오 바론에는 사람이 모였다, 잭이 상상했던 것보다 꽤나 많이.
슈라에게는 이 불안정한 자와메에 미치는 나름의 카리스마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근원은 바론이라는 이름을 내걸은 힘이었다. 네오 바론 따위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아자미의 부탁과 페코의 문제를 떠나서 잭이 자와메로 돌아오면서 가진 감정은 조금 달라졌을 터였다.
피곤해진 잭은 약간의 배고픔도 무시한 채 드러누웠다. 생각해보니 저녁 즈음에 파르페 말고 제대로 먹은 게 별로 없었다.
자와메에 통용되는 바론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이렇게 될 줄, 카이토는 생각해본 적 있을까. 잭은 아직 그 이름을 벗지 않았다. 뉴욕에서 바로 돌아온 행동이 잭이 아직 누구보다도 바론의 일원임을 증명했다.
카이토 때문이 아니다.
바론의 이름을 짊어지고, 주어지는 시선과 맞닥뜨려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서다. 바론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의미를 알아가고 있어서다. 바론이 이 도시에서 거머쥐었던 힘의 형태를 깨달아서다.
정말, 곧 떠나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생활의 흔적이 남은 물건이 거의 없었다. 필립이 떠나있던 시절에는 정말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제대로 된 유품도 남아있지 않아서, 화이드보드에 묻은 손자국 하나조차 지우지 못했던 나날들. 필립이 돌아왔는데도 여전했다.
필립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
'아버지와 쇼타로의 물건은 저렇게 많은데.'
필립이 머리를 고정하는 집게를 집어들며 아키코는 청소에서 잠시 벗어나서, 필립의 공간에 대해서 생각했다. 최초로 짧은 휴가를 떠나기전에 필립이 말했었다.
"방이란 게 있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차고의 한 편은 필립의 공간이기는 했지만 방이라고 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개조를 하기도 마땅치 않고 워낙 돌아다닐 일만 계속 일어나는 사무소다보니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는데, 당사자인 필립이 말을 꺼내자 쇼타로도 적극 찬성했다.
"그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몰라도 언제까지나 리볼 개리랑 한 공간에서 사는 건 좀 그렇지."
"저요! 방이 만들어지면 인테리어는 이 소장님이 하겠습니다!"
"네가 꾸미면 방이 분홍색이 되는 거 아냐?"
"분홍색이 뭐 어때서! 그치, 필립군?"
"색깔에 편견을 가지는 건 나쁜 일이지. 소장님의 안목을 기대해볼까?"
아주,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아키코는 새삼 생각했다. 차고를 개조해서 필립의 방이 생기는 날, 작은 방 안에서 조촐한 파티를 벌이고 집들이처럼 선물이라도 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 뒤로도 시간이 흐르면 이 탐정 사무소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겠지, 필립의 방을 포함해서.
그 때쯤에 다시 한 번 청소를 하면서, 그 땐 필립의 흔적이 잔뜩 묻어있는 물건들이 여기저기서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필립의 방 안뿐만 아니라, 차고의 구석도 쇼타로의 책상 아래도 사건 파일을 넣어둔 책장 곁에도 좋다.
그렇게 모두의 기억이 쌓인 공간 안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 모르는 미래의 자신을 아키코는 상상해보았다.
……조금도 모르겠다. 역시 소장님인가?
버릴 물건과 정리가 덜 된 물건 사이를 걸어나오며 아키코는 잠깐 쉴까 하고 찻잔을 집어들었다. 커피가 나을지 홍차가 나올지 고민하다가, 아키코는 테이블 위에서 와장창하고 드리퍼를 굴러떨어뜨렸다. 아차, 하고 주워들자 오래 쓴 것이라 원래도 그리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것이지만 영 사용하기엔 불안했다.
'청소가 끝나면 새 걸 사오자.'
커피 원두 대신 홍차 티백을 꺼내며 아키코는 뜨거운 물을 끓였다. 둘 중 뭘 마셔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던 조금 전과 달리 괜히 고장난 드리퍼에 마음이 가니,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산 타코야끼의 뜨거움에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 아리사토가 탐문을 하는지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저쪽에 모여서 과자라도 먹으며 떠드는 동료들 사이에 나루카미도 보여 요스케는 죄를 지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꼭, 이럴 땐 말이지.
"야 하나무라! 왜 청승맞게 혼자 먹고 있어. 이쪽으로 와!"
"남자란 고독을 씹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말도 안 되는 허세를 부리며 요스케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토나카 치에는 고기꼬치를 씹으며 아리사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누군가의 관심이 소홀해진 것 같을 때 상대방 모르게 이유를 파헤쳐볼 수 있는 방법? 으음…… 고기를 사준다?"
"그건 뇌물을 주고 상대의 호감을 사서 느슨해진 상태에서 질문해본다는 뜻인가, 때에 따라선 나쁘지 않군."
아무리 봐도 그 뜻이 아닌데요. 하나무라는 역시 이 사람은 좀 어렵다고 생각하며 키리조 미츠루의 옆자리를 슬슬 피했다. 적당히 아마기 유키코와 아마다 켄 사이에 빈 자리를 발견한 요스케는 모여있는 면면을 확인했다. 이미 확인한 사람들 말고는 아이기스와 시로가네 나오토가 있었다. 꽤 많은 인원이 모여있어서 혹시 화제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도 묻히기 쉬워보여 요스케는 안심했다.
"나라면 환경을 조사하겠지. 학생회장으로서의 의견이다만, 무언가 불만이 생기는 데엔 반드시 전후의 또다른 변화가 존재한다. 그 근원을 파헤치면 대개의 경우는 옳은 결과가 나오지. 시간은 꽤 걸리지만 말이야."
"키리조씨답군요. 탐정으로서 저도 찬성하는 바입니다. 원인이란 변화를 뜻하기도 하니까요.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끝없이 추리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죠."
"헤에, 역시 탐정왕자는 다르다니까. 역시 나오토야. 일리도 있고 멋도 있고. 아, 키리조씨도요."
유키코가 언제나처럼 칭찬하며 빤히 쳐다보자 나오토가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키코야 그렇다치고 아마다의 시선도 나오토에게 향해했던 탓이었다.
"시로가네씨처럼 멋진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탐정이긴 하지만 저도 딱히 어른이진 않아요, 아마다군."
"그런데 리더, 어째서 이런 것을 물어보신 겁니까?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요주의 인물은 아마기가 아니라 아이기스인가! 요스케는 타코야키가 목에 걸리는 기분으로 경청했고 아리사토는 아주 무난하게 대답했다.
"조금 신경 쓸 일이 있긴 한데, 이런 일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싶어서."
"……."
아마다가 어쩐지 시무룩해지고 사토나카가 다시 고기를 먹으면 사이가 좋아진다고 주장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나루카미가 뜨거운 차를 단숨에 마셔버리고 입을 열었을 때 요스케는 사형선고를 받는 기분이었다.
"그거 나도 알아. 전학을 다니다보면 가끔 겪거든. 기묘한데 뭐라고 말은 못하겠고."
"나루카미군은 어떻게 했었어?"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전학가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말이야. 가끔 생각나곤 해. 그 애는 나한테 뭔가 있었던 걸까, 내 착각인 걸까 하고."
요스케는 나루카미가 학교에서 사라지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쩐지 타코야끼의 소스맛이 갑자기 종이 같아서 기분이 나빠졌다.
결국 쓸 만한 의견은 전후관계를 조사해보자는 것 정도였다. 아리사토는 많이 참고가 됐다고, 고맙다고 하며 돌아갔다. 아리사토가 돌아간 뒤 여자들 사이에서는 저 아리사토가 뭔가 그런 걸로 고민하고 있다면 보통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며 수군거렸고 요스케는 온몸으로 의뢰를 수행하고 있는 아리사토에게 줄 의뢰 보수는 지금 가진 걸 전부 털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조사 결과가 나온 모양입니다, 하나무라님."
"너한테 감동했어, 아리사토. 솔직히 사소한 의뢰인데 이렇게까지 해주고."
"맡은 일이니까. 그냥 물어보는 정도니까 그렇게 돌아다니지도 않았고."
사실 요스케가 감동한 점은 조금 달랐지만 아리사토는 이해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 테이블에서 대화 이후로 아리사토는 그렇다면 하나무라 요스케가 이 문화제 미궁에 오기 전과 지금 상황에 대체 무슨 변화가 있는지를 탐구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리사토가 말한 결론은 요스케가 생각하기엔 꽤 처참한 이야기였다.
"과연, 좋은 조사결과입니다 아리사토님."
엘리자베스의 칭찬에도 표정변화가 없는 아리사토가 요스케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냐는 물음이겠지만, 요스케는 대답할 기운이 들지 않았다.
"납득은 가니까 뭐, 의뢰 완수로 하자. 내가 줄 건 그리 크진 않지만……."
비밀을 지켜준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주머니의 끝까지 털어 마련한 것들을 건네주자 아리사토는 만족한 것 같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 엘리자베스가 정갈하게 인사했다.
"그럼, 의뢰자분도 수행자분도 매번 감사합니다. 중개인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중개인 놀이를 시작한 엘리자베스가 악덕 사채업자처럼 방긋 웃었다.
장난감 상자를 열었다. 그가 스스로 알아차리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안에는 여자 아이의 인형, 블럭, 고무 공, 모조 망치, 플라스틱 마이크, 커다란 양말, 음식 모형, 모델 총, 작은 앞치마가 보였다. 그는 장난감 상자에 손을 집어넣었다. 잡힌 것을 하나 꺼냈다. 갑자기 무수히 많은 장난감들이 쏟아져나와 상자 주변에 흩어졌다. 흩어진 알록달록한 블럭들 사이로 고무 공은 저 편으로 굴러가버렸고 음식 모형은 갈라져있던 모양대로 나뉘어 떨어졌다. 망치가 콩콩 소리를 내며 스스로 움직여 바닥을 쳤고 모델 총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끝부분의 조명에서 빛을 발했다. 무슨 영문인지 앞치마는 반쯤 접힌 채 양말에 구겨져 들어가 함께 굴렀다. 안에는 아직 상자 위에서 보지 못한 더 많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의 눈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그는 여자 아이의 인형을 집어들었다. 엉성한 바느질로 마감된 헝겊인형의 눈은 손톱 크기만한 단추였다. 한 쪽 눈에서 풀려나온 실밥에 손끝을 가져다 대자 처음부터 끊어져 있던 것처럼 실이 미끄러지며 단추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지금이라면 바느질을 할 줄 몰랐다. 그리고 실과 바늘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추를 주워들어 원래 있던 자리에 갖다댄다고 해서 인형의 눈이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는 인형을 품에 안고 흩어진 장난감들을 하나씩 주워서는 상자 안에 담았다. 접힌 앞치마는 바르게 개고 양말은 예쁘게 접고 단단한 장난감들은 모양을 맞추어 겹치지 않게 자리를 정하고 조각이 나뉜 것들은 온전하게 맞추어 넣는다. 어느새 상자가 가득 찼다. 그리고 그는 맨 위에 인형을 아주 살짝 올려놓았다. 눈이 돌아온 것처럼 단추는 얼굴 위에 올려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상자의 뚜껑을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닫았다. 아직은 인형의 눈이 제자리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다만 그가 그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럴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상자 속의 물건들은 바깥에서 보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만 같았다.
아가들아, 그렇게 보채도 재밌는 얘기는 별로 없단다. 그렇게 조르거든 나조차도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듣겠느냐? 재밌을지는 모르겠다만은, 오히려 무서운 이야기일지도 모르지.
날개깃은 소중히 여기고 있더냐? 우리들이라고 해도 깃이 다 빠져버리면 날지 못하고 대지 위를 기어다니는 산짐승처럼 비루해지겠지. 그래, 너희들도 날아다닐 때에는 명심하렴. 추락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 한번쯤은 겪게 되겠지만 말이다.
으레 있는 법이지. 힘이 깃든 것을 모아 새롭게 창조하는 일에는 나도 꽤 흥미가 있단다. 내 일이, 그대들을 부르는 소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더냐. 나조차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저 날짐승들의 깃을 모으면 무언가를 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후후, 그야 산 채로 날개를 뜯겼다면 이런 이야기로 끝나지는 않았을 터, 그랬더라면 아가들에게는 들려줄 수 없는 이야기였겠지. 우리들의 사냥터에서 용케 죽지 않고 깃털을 모으던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어떻게 되었는지는, 글쎄. 후에 알게 되신 여왕님도 의외셨던 듯 하더니.
깃털로 베개라도 만들었다면 아주 평화롭지 않았겠느냐? 전혀 그렇지는 않았다고 그러더구나. 우리 일족의 날개가 떨어뜨린 흔적을 모아서 무얼 했는지 몰라도, 깃을 묶어놓은 것을 한번 휘두른 순간 태풍처럼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바람이 일어났다고 들었지. 지긋지긋하다는 그리폰들 정도가 아니면 견딜 수 없을 그런 거센 바람이 말이다.
"몸은 괜찮나?"
"……아픈 건 아니었어."
"그럼 다행이군. 네가 아프기라도 하면 내가 면목이 없으니까."
누구에게, 라는 말은 린다가 꾹 삼켜야하는 것이었다. 린다의 몫처럼 놓인 의자에 앉아서 그녀는 힐끔힐끔 우스를 보았다. 우스는 며칠 전과도, 더 며칠 전과도 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겠지.'
속은 아마 다를 것이다, 라고 린다도 침착하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 태도가 신경 쓰이는 것이다.
어떻게 저렇게 평정을 지킬 수가 있지, 내부인이라기보다 협력자에 가까운 위치라고 그녀의 상관이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냉정하게 아 그렇구나, 할 수가 없었다. 두고 온 사람들 생각에 바짝바짝 혀도 입술도 마르고 있는 린다는 어느새 노골적으로 우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따가워진 우스가 책을 덮었다.
"할 말이 있다는 얼굴인데, 아가씨."
"린다야."
"무슨 일이지, 린다?"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아니면 그런 척 하는 거야?"
우스는 눈치없는 인간이 아니었다. 탁자에 책을 내려놓고 린다와 진지하게 마주하고는, 우스도 물었다.
"어느 쪽이어야 만족할 겐가?"
"뭐?"
"생각보단 팔팔해서 다행이긴 한데, 그렇게 묻는 걸 보면 엄청나게 바깥이 신경쓰인다는 거겠지. 나도 그러길 바란다면, 신경은 당연히 쓰고 있다고 해주겠어."
"그럼……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냐고, 아무리 평정을 잃고 있어도 꺼내기 힘든 단어가 목구멍에 걸렸다. 린다는 우스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렸다. 오히려 우스 쪽에서 그녀를 꿰뚫어버렸다.
"어떻게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는지가 의문이라면, 나는 린다 아가씨가 없어도 쭉 이랬어. 딱히 자네 앞이라고 해서 감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감추려고 할 것도 없지. 나는 린다의 편이니까."
"내 편……?"
"자네가 나를 믿으라는 상관 말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자네 편이 아니면 어떡하겠나? 뭐, 이건 무슨 얘기냐면 자네까지 내 편일 필요는 없다는 거야. 비슷한 곳에 서 있다고 해도 입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지. 그래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책을 읽는 것처럼 보여서 자네가 화가 났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아."
침착하고, 차분하고, 온화하다. 이 세 단어로 눈앞의 사람을 떠올리면서, 그것과는 반대로 린다가 폭발하고 말았다.
"나더러 어떡하라는 건데!!"
몸을 움직일 일은 집안일이나 산책 정도뿐이고, 집 안에서 할 일을 찾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여기는 린다가 살아가던 곳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불안감이 몸을 감싸오고 흉흉하기 짝이 없는 소식들이 저절로 찾아와 목을 조른다. 우스더러 어떻게 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것은 안다. 우스를 탓할 수도 없다. 유일하게 아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너무도 평온해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 비이성적인 기분이 얼마나 치졸한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투정부리듯 폭발시키고 말았다.
씩씩거리며 부끄러워진 린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어깨를 커다란 손이 감쌌다. 얼굴을 드니 우스가 진지한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하네."
"왜 사과하는 거야…… 짜증낸 건 난데."
"자네를 안심시키는 것도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아까 들은 얘기가 어지간히 신경을 긁었나보군. 그건 나도 신경쓰였던 참이야."
아아, 어머니. 생명 없던 것의 어머니 되는 자여.
멋대로 낳아놓은 가혹함의 반이나 되는 자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제드는 인과를 뒤집었다. 저 공격을, 빗나간 것으로 바꾼다. 뒤바뀌었다는 사실은 오직 제드의 감각에만 남는다. 엇나간 피격이 제드를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쳤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한 발자국 뒤의 아군이 피투성이인 것까지는 제드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레온!!"
아벨이 달려가서 일으켜 세우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인형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다는 뜻이었다. 까드득 까드득 소리를 낼 것 같은 거대한 해골이 이쪽을 쳐다본다. 마치 노려보는 것처럼 거대한 압력 속에서 아벨은 검을 들어 파편을 쳐냈다. 그 순간 제드가 달려나갔다. 인형의 지시는 없는 채였다.
"제드, 위험……!"
"남 걱정 하지 말고 아벨은 거기 있어!"
제드의 손에서 지각까지 비틀어버리는 힘의 잔재가 흘러나왔다. 아벨은 제드의 몸에서 뚝뚝 흘러나오는 핏방울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 번 있었던 일이지만 언제나 착각처럼 제드는 그 다음 멀쩡하게 저 편으로 뛰어서 적의 등 뒤를 치곤 했다.
제드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이제는 아벨도 알고 있었다. 계속 보아도 익숙해질 수 없는 힘일 뿐이었다. 아벨이 믿는 것은 자신이 단련해온 품안의 검이었지만 제드가 몸을 맡긴 것은 믿음마저 부숴버릴 수 있는 힘이었다. 그 힘의 선악이라던가 가부를 논할 자격은 아벨에게 없었지만, 언제나 저렇게 달려나가서 혼자 싸울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짊어진 듯한 제드를 보고 있으면 그 옆을 비울 수 없다는 기분이 들곤 했다.
아벨이 마지막으로 찾은 기억에 자리잡고 있던 제드를 떠올리는 것처럼.
그래서 정신을 차려보면 언제나 달려나가 있었다.
"혼자 둬도 되는…… 거야?!"
"우리가 쓰러뜨리면 문제없겠지, 안 그러냐 제드?"
"당연한 소리 할 거면 빨리 공격이나 해!"
제드에게 잔소리를 들은 아벨이 그 커다란 검으로 어디를 찔러야할지 모를 소름 끼치는 해골의 허를 감으로 찔렀다. 마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한 파동으로 제드가 저 멀리 튕겨졌지만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다시 자세를 잡은 제드가 반격을 개시했다. 아벨이 모르는 사이에 벌써 인과가 두세 번쯤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적 앞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전사가 아니던가. 무언가 부서져내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 먼저인지, 아벨이 전력을 다한 일격을 내리친 것과 동시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벨의 코앞에서 엉망진창이 된 듯한 해골조각이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나며 아벨을 멀리 튕겨보냈다. 제대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아벨은 어디가 상했는지 구역질을 참으며 일어났다. 입가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제드는 무사한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 아벨은 제드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처음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