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디페스타 발행 회지 [모아지는 온기]


"아차차차!"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의자 다리에 걸려서 휘청대는 것은 운동신경이 좋은 텐마 츠카사답지 않은 일이라, 주위의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쪽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넘어지지는 않고 그대로 균형을 잡은 츠카사가 한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몸과 함께 기울어진 가방의 지퍼가 미끄러져 안에서 무언가 데굴데굴 굴러나왔다. 둥글어서 일단 굴러는 가지만 그렇다고 아주 동그랗지는 않은 무언가였다. 루이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그것을 쳐다보았을 때, 에무가 먼저 말했다.


"츠카사 군, 털실을 갖고 다녀?"
"어? 겨울이잖아."
"겨울이라고 털실을 갖고 다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네네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츠카사는 자신의 말에서 빠진 부분이 무엇인지 서둘러 보충했다.

"뜨개질하고 있으니까 그런 거라고!"
"아, 겨울이란 건 그런 뜻이었구나."

 

 루이는 허리를 살짝 숙여 털실 뭉치를 주운 뒤 츠카사에게 내밀었다. 츠카사는 털실을 가방 안에 되돌리고는 지퍼를 닫았다. 그런다고 에무의 호기심을 억누르기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럼 뜨개질할 줄 알아?"

"뭐 작은 것 정도는……."

 

 사정을 들어보니 병원에 오래 있던 사키에게 앉아서 할 수 있는 취미를 이것저것 같이 해주다가 츠카사 본인이 재미가 붙었던 모양이었다. 츠카사도 그리 자주 하지는 않지만 겨울이 되면 생각이 나는 듯했다. 무엇을 만드냐고 물어보자, 츠카사는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올해는 사키가 완전히 퇴원하고 맞는 겨울 기념으로 무언가 만들어주기로 한 거야."
"그럼 뭘 만들고 있었어?"

 

 방금 생각난 것을 대본에 메모한 뒤 루이가 지나가듯이 말했다. 츠카사는 별 생각없이, 보여주는게 빠르겠단 생각에 다시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거기에는 분홍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살짝 무늬가 들어가고 있는 중인 둥근 편물 조각이 있었다. 크기가 장갑보다는 커보였다.

 

"이런 느낌의 모자인데."
"귀여워!"
"제법 잘하네."

 

 눈을 반짝이는 에무는 호기심이 더욱 증폭된 것 같았다. 츠카사의 평가가 다소 박한 네네도 인정할 정도로 제법 잘 뜬 조각이었다.

 

"사키쨩은 좋겠다~ 이런 걸 해주는 오빠도 있고."
"에무도 좋은 오빠들이 잔뜩 있잖아?"

 

 물론 츠카사도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 오빠들이 뜨개질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에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에무답게,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아! 그럼 내가 만들어서 오빠들한테 선물할래! 언니한테도!"

 

 어째서 그런 흐름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에무의 머릿속에서는 손수 만든 것을 주고받고 싶다는 결론으로 귀결된 듯했다.

 

"츠카사 군, 뜨개질 가르쳐줄 수 있어?"
"안될 거야 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하면 겨울 끝날 때에나 완성되면 어쩌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래!"

 

 옆에서 루이가 쿡쿡 웃었다. 이것도 에무다운 결론이었다.

 

"그럼 오늘 연습이 조금 일찍 끝나면, 다같이 쇼핑갈까?"

 

 그렇게 제안한 사람은 메가폰을 잡고 있는 루이였다. 뭔가 집에 공작 재료가 떨어져서였다. 뜨개질을 배울 거면 바늘과 털실을 사야하는 에무는 당연히 찬성! 하고 외쳤다. 네네는 그렇게 내키지는 않는 것 같았지만 모두가 간다고 하면 좋다고 대답했다. 물병을 가져온 츠카사는 두 번째로 가방을 되돌려 놓고 대본을 집어들었다.

 

"자, 다시 연습이다 연습! 루이, 다음은 어디부터야?"


 

 

 

 

 

웹 업로드 글 [라푼젤과 세레나데]


 쿠사나기 네네의 눈이 세모꼴이 되면 으레 무언가 황당한 말을 들었을 때다. 그리고 대개 원더랜즈 쇼타임의 단장인 텐마 츠카사를 향한 시선일 때가 가장 많았다.

 

"뭐라고?"
"다시 한번 말해주지! 다음 각본은 라푼젤과 전설의 검이다!"
"……무슨 내용인데?"
"라푼젤이 탑에 갇혀 있고 청년이 찾아오는 것까지는 똑같지만, 사실 라푼젤이 갇혀 있던 이유는 라푼젤은 탑을 벗어나면 전설의 힘을 가진 검으로 변하기 때문이지! 청년은 그 사실을 알고 라푼젤이 완전히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검이 된 라푼젤을 들고 모험을 떠나서 라푼젤의 저주를 푸는 활극이다!"
"……그거, 라푼젤이 남아있는 거 맞아?"
"츠카사 군은 라푼젤이 갖고 있는 탑과 이별의 이미지를 이용하고 싶은 게 아닐까? 그런 내용이라면 무대에 탑의 이미지를 조성해야 하는데, 지금 갖고 있는 장치로는 이런 게……."
"정말정말 재밌겠다! 그래서, 와이어를 달고 탑에서 뛰어내릴 수 있어?"

 

 옆에서 에무가 눈을 반짝거리며 묻자 루이가 무대의 높이를 가늠해보더니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높이는 안 되겠지만, 이 정도로 한 다음에 조명의 눈속임을 이용해서 배우는 무대 뒤로 사라지고 검을 청년 역의 배우가 받아내면 돼. 좀 더 긴박감 넘치게 하고 싶으면 라푼젤이 탑을 나오는 순간 탑을 무너뜨리는 느낌을 내는 것도 좋겠는걸."
"오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루이!"

 

 네네는 라푼젤 역만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도 포기하기로 했다. 다소 황당하기는 해도 츠카사의 각본과 루이의 연출은 쇼로서는 제법 괜찮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배역을 선정한 결과, 기존의 라푼젤 이미지에는 네네가 어울린다는 말이 나왔지만 네네에겐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각색극인데 어울리고 말고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데다가, 네네가 '이것만은 좀'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원더랜즈 쇼타임의 인원적인 한계였다.

 

"라푼젤 역은 무대 전체의 등장 시간은 적고, 그 뒤는 검으로 등장하면서 목소리로만 출연을 하게 되어 있지. 라푼젤 역은 다른 역할과 1인 2역을 하기엔 존재감이 있는 배역이니까 그것도 어려워. 청년이 모험에서 만나는 여행자와 마녀 역할에 에무와 네네가 들어간다면, 라푼젤을 할 수 있는 건……."
"루이 군이네."
"루이잖아."
"나뿐이네."

 

 만장일치, 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본인마저도) 라푼젤로 루이를 낙점해버렸다. 츠카사는 조금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할 수 있겠어 루이?"
"직접적인 분량은 적으니까, 목소리를 미리 녹음해두기만 하면 오히려 그 뒤에 무대장치를 조작하러 가기 편할 것 같아. 이럴 경우엔 내가 할 수밖에 없겠네."

 

 그리고 편견 한 점 없는 텐마 츠카사도 당연히 동의했다. 어차피 라푼젤의 머리카락은 가발을 써야 하고, 쇼를 하는데 라푼젤 배우의 성별이 남자인 게 뭐 문제라고.

 

"그럼 결정됐다! 멋진 연출 부탁해, 루이."
"이번에도 심혈을 기울여야겠네. 대본은 거의 완성되어 있는 모양이니까 가볍게 리딩만 해볼까?"

 

 리딩은 배우들이 배역의 느낌을 살리고, 다른 사람과 호흡을 맞추고, 연출가가 연출을 창안하고 수정하는 데에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들 진지하게 임하는 와중, 첫 번째로 걸리는 부분이 생겼다.

 

"역시 만남이 중요한데, 뭔가 강조할 방법이 없을까 루이?"
"이대로는 조금 심심한 건 사실이네. 주역과 주역의 만남이니까…… 탑이 이쯤에 있다고 치고."
 루이가 갑작스럽게 의자 위에 올라가 섰다. 안 그래도 키가 큰 편인 루이가 올라가자 제법 높이 차이가 났고, 츠카사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실제 탑 장치는 이거보다 높게 할 거지?"
"응, 객석 뒤까지 잘 보이려면 그래야 할 거야. 원래 그 탑은 굉장히 높다는 설정이니까 서로의 얼굴 같은 것도 잘 보이지 않겠지…… 그 상황에서 저편의 상대를 불러내고 싶다면 어떻게 할까?"

 

 연출가가 배우에게 묻자, 배우는 잠시 후 즉각적으로 답을 내놓았다.

 

"큰 소리로 부른다!"
"그거 그냥 평소의 츠카사 아니야?"
"츠카사 군이라면 크게 부를 수 있겠지~"
"음…… 그래, 이 부분을 이렇게 고치자. 츠카사 군이 큰 소리로 몇 번이고 불러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엉뚱한 것들이 떨어지거나 하는 거야. 단순한 코미디 요소를 섞은 다음에, 분위기를 반전해서 청년과 라푼젤의 만남을 만드는 거지. 분위기를 반전하는 요소는 역시 노래가 좋을까."
"노래?"
"듣고 있으면 부드럽고 아름다워서 탑의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밖에 없는 세레나데라면, 라푼젤도 흥미를 가지겠지? 좀 어려운 요구일지도 모르지만, 무반주로 시도해줬으면 해. 그 편이 더 정성을 들인 느낌이 나니까."
"좋아! 그럼 이런 느낌인가……."

 

지금 고친 부분이라 대본에는 들어가 있지 않았지만, 츠카사는 대사를 읊었다.

 

"이름도 모르는 그대가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진심을 다해 내 마음을 전하는 것뿐이오."

 

 깊게, 아주 깊게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유난히도 그 순간의 정적은 많은 이들에게 길게 느껴지곤 한다. 그리고 고작 한 박자 뒤에 시작되는 것은.

부르고 싶은 이름도 알 수 없어서
애타는 이 마음을 전할 말 찾지 못하네
드높은 하늘 가까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창 하나 너머에 있는 그대는 환상이었나
어쩌면 착각일지 몰라도 그래도 알고 싶은걸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면
그대 창 밖으로 고개 들어주오
타오르기 시작한 이 마음은
어떻게도 끌 길이 없어서
내 두 팔 가득 그대를 느끼지 못해도
내 두 눈 가득 그대를 담을 수 있다면
불길 위에서라도 행복하리

 

 굉장히 장절한 세레나데가 끝난 뒤 옆에서 에무가 박수를 힘차게 쳤다. 네네도 예의상 치는 것 같지만 진심인 박수를 쳐주었다. 방금 전 노래는 꽤나 잘 부른 게 사실이었으니까. 박수를 치는 대신 루이는 의자에서 내려와 대본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노래가 진행되는 동안 탑 안쪽에서 움직이는 그림자가 무대로 드리워지는 게 점점 커지고, 관객들의 기대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가면 되겠어. 아, 츠카사 군."
"왜?"
"방금 전 노래는 극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안 어울릴 것 같으니까, 다른 노래로 바꿔야 할 것 같아."

 

 루이가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하자 연출가를 충실히 따르는 배우는 분한 얼굴이 되었다.
"에에잇, 회심의 세레나데였는데!"
"그 점은 아주 잘 느껴졌어.
"맞아, 츠카사 군 굉장했어!"
"예전보다 실력은 조금 나아졌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대화가 오가는 동안 루이는 츠카사의 대본을 슬쩍 가져가서 주의할 부분을 메모해서 돌려주었다. 알아보기 쉽게 빨간 글씨와 파란 글씨로 연기의 지시와 구체적인 행동 방침, 무대의 동선 방향까지 적혀 있어서 츠카사는 역시 루이라고 생각하며 내용을 머리에 집어 넣었다. 세레나데를 부를 것을 지시하는 부분에는 애절함과 진지함을 조금 낮출 것, 이라고 적혀 있었다.

 

"애절함과 진지함을 조금 낮춘다라…… 어떻게 해야 하지?"
"츠카사 군은 늘 역할에는 진심을 다하니까 힘을 빼는 게 오히려 어려울지도 모르겠네. 전체적인 분위기를 연습하다보면 될 거라고 생각해."
"이제 그럼 다음 장면을 연습하러 가자!"
"아, 깜빡했는데."

 

 바닥에서 일어나 의욕이 넘치는 츠카사에게 자리에 다시 앉은 루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정말 멋진 세레나데였어. 내가 들을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해."
"결론적으론 퇴짜놓고 칭찬하기냐, 뭐 재밌었으니까."

 

 그렇게 기묘한 라푼젤의 연습은 계속되었고, 루이의 연출에 따라 세레나데는 점점 극에 맞는 방향으로 고쳐져 나갔다. 그 점을 내심 아쉬워하는 점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츠카사와 루이는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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